금융계에는 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글로벌기업이 없을까.

부족한 자본력,빈약한 전문인력,금융-산업 분리와 같은 금융규제 등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취약한 경영풍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원인이다.

과거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의 짧은 수명이 대표적 사례다.

대기업그룹 계열 금융사들은 오너의 인사구도에 따라,은행은 관치(官治) 입김 등으로 3년 임기조차 제대로 채우지 못한 채 중도하차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무리 유능한 CEO라 하더라도 3년 임기 뒤에는 후배를 위해 용퇴하는 게 미덕(?)으로 받아들여지질 않았는가.

잦은 CEO 교체는 경영의 일관성을 해치고 장기비전 설정을 어렵게 만든다.

CEO들도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임기를 마치면 된다"는 무사안일주의에 젖기 십상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기초를 다지는 경영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셈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이런 분위기가 크게 바뀌고 있다.

연임은 물론 3연임을 하는 '장수 CEO'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재보험사인 코리안리의 박종원 사장(63)이 지난 14일 정기주총에서 4연임(12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금융회사 CEO로 10년 이상 일하고 있는 경우는 간혹 있지만 같은 회사에서 연거푸 4연임을 한 것은 박 사장이 처음이다.

특히 그가 9년 전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관료출신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박 사장은 "성과에 근거한 연임은 당연하다"며 "경영도 인생설계와 마찬가지로 길게 봐야 한다.

씨를 뿌리기도 전에 농부가 바뀌면 결실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CEO가 소모품으로 간주되는 시대는 지났다"며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전문경영인 체제가 정착되려면 CEO가 CEO 대접을 받는 'CEO 시장'이 형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회사 전문경영인에 관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한 박 사장을 집무실에 만났다.

-금융계 최장수 연임기록을 세웠습니다.

"9년 전 외환위기 여파로 부도상태까지 내몰렸던 회사에 들어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정상화를 이뤄냈습니다.

공적자금도 한푼 받지 않고서요.

이제 코리안리는 세계 13위,아시아 제1위의 재보험사로 성장했습니다.

자부심을 느낍니다.

게다가 4연임이라는 영광까지 얻었으니 감회가 새로울 뿐입니다."

-연임은 당연히 대주주들이 요청했을 텐데요.

"지난 3월19일 창립기념일에 대주주가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한번 더 맡아달라고 공식 요청해왔지요(※대주주인 원혁희 이사회 의장이 기념식 인사말 도중에 박 사장에게 연임을 요청하면서 직원들의 박수를 이끌어냈다).지금까지 한 번도 먼저 연임하겠다는 뜻을 밝힌 적이 없습니다.

4연임은 경영성과와 대주주의 신임,그리고 직원들의 주인의식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한번도 곁눈질하지 않았습니다.

죽어가는 회사를 키워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려는 욕심,이런 일관된 생각이 오늘을 있게 했다고 봅니다."

-요즘 금융계에 CEO 연임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성과가 좋으면 연임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바람직하기도 하고요.

과거 금융회사 CEO는 대부분 단임이었습니다.

연임이라도 하면 운이 좋다는 소리를 들었죠.하지만 그런 CEO의 단명 풍토가 금융의 경쟁력을 다 갉아먹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업경영은 인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길게 봐야 하지요.

CEO가 새로 취임하면 적어도 1~3년 정도는 지나야 제대로 된 경영전략과 영업정책을 짤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초임 때는 씨를 뿌리는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싹도 트기 전에 경영자가 바뀐다면 어디 제대로 된 결실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잘 되는 곡식이라면 또 다시 씨를 뿌리고,토양과 기후에 맞지 않다면 다른 씨를 뿌리면 되는 겁니다."

-4연임이면 '경영 독재'라는 지적도 있을 텐데요.

"그런 지적이 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실적이 뒷받침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코리안리는 지난 9년간 연평균 13%씩 성장했는데 이는 보험업계 평균 성장률(4.9%)를 훨씬 웃도는 수준입니다.

주가는 취임 때 700원대에서 1만5000원까지 올랐습니다.

기업가치가 20배 이상 높아진 셈이죠.그동안 코리안리의 경영전략과 영업정책이 효과를 발휘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주주와 시장,그리고 직원들이 CEO의 성과를 에누리없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만약 회사의 성장세가 둔화된다면 군말 없이 떠날 각오가 돼 있습니다.

말이 제대로 달리지 못하면 기수를 교체하는 건 너무도 당연합니다.

기업의 요체는 성장과 이윤입니다.

경영 독재라는 지적도 있지만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료출신 CEO가 늘고 있습니다.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관료 출신 CEO의 장점이 많습니다.

'국가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관료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수립을 하고 기획을 하면서 매크로적인 사고가 아주 잘 발달돼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제대로 써먹는다면 훌륭한 CEO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입은 닫고,눈과 귀는 활짝 여는 자세입니다.

상대를 인정하고 겸손해야 하지요.

저는 재경부 공보관 시절 기자들의 쓴소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관료의) 때를 벗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정착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전문경영인 체제가 확립되려면 우선 CEO 시장이 형성돼야 합니다.

그동안 CEO는 오너의 소모품 정도로 간주돼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CEO가 CEO로 대접받을 수 있는 CEO시장이 제대로 형성돼야 주주와 CEO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전문경영인으로 갖춰야 할 자질이 많을 텐데요.

"제 경험으로 보면 경영은 '종합예술'입니다.

CEO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아야 한다는 말이 있죠.여러 악기에서 나오는 다양한 소리를 잘 조화시켜야 하듯 CEO는 전략 조직관리 영업 등 부문별 강약을 조화시켜야 합니다.

구성원 개개인들이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얘기죠.하지만 요즘 CEO들은 지휘자 역할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창작을 하는 작곡가 역할까지도 해내야 하지요.

시대변화와 환경변화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발하지 않으면 반쪽 CEO로 전락하고 말 겁니다."

글=장진모/사진=양윤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