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準亨 < 서울대 교수·공법학 >

'IT강국'이란 명칭이 더 이상 낯설지 않지만,전자정부 분야에서 한국은 주목받는 나라다.

몇 년 전 덴마크 정부의 전자정부 담당부서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전자정부 국제 비교에서 늘 우리보다 몇 순위 앞선 자리를 차지해온 나라이기에 벤치마킹할 것이 많으리라는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그들 역시 한국에 큰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전자정부가 각종 민원서류를 집안에서 자가 프린터로 발급받는 'G4C' 서비스를 구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듣기 좋은 말만 나온 건 아니었다.

가령 공적 증명서를 굳이 집안에서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지,위·변조 등의 위험은 없는지,정부 각 부서의 전산기능을 통합할 경우 수반되는 보안 문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등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전자민원 서비스라고 하면 집안에서 주민등록등본을 뗄 수 있도록 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식 집착이 과연 현실적으로도 합리적인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최근 몇 년간 눈에 띄게 달라진 주민자치센터에서 손쉽게 발급받을 수 있는데,굳이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1년에 평균 몇 번 이용하지도 않는'G4C' 서비스를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만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한국 전자정부의 'G4C' 서비스의 투자효과를 그렇게 단기적인 관점과 개인 수준에서만 판단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민원서비스를 원스톱에서 논스톱으로 바꾸는 일이 가지는 의미 등 그 기대효과는 평가절하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그 효과가 체감할 수 있을 만큼 가시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일단 그 효과가 가시화돼 민원서비스를 혁신하면 그로부터 절약되는 자원을 주민복지 등 더 요긴한 부문에 투입할 수 있게 되며,그 때 가서 결국은 가치 있는 투자(value for money)였음이 판명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어쩌면 유난스럽기 짝이 없는 광신적 아이디어와 시도가 있었기에 전자정부가 현실적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들이 수반되며 해결방법은 무엇인지,어떻게 해야 그 이용을 활성화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점인데,이는 '망가지지 않는 한 고칠 필요가 없다'는 태도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소중한 혁신의 교훈이다.

어느덧 여름이다.

'대선 장'이 섰지만 한국정치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정부는 임기가 끝나 가는지도 모른 채 언론,대학,기업,노조 등 상대를 바꿔 가며 씨름을 벌이느라 여념이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참여정부만큼 혁신에 몰두한 정권도 없었다.

유독 경제와 교육 등 핵심분야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혁신의 정신을 쏟지 않았지만,그동안 성과도 적지 않았고 혁신의 전도사들도 꽤 많이 배출된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누가 이 혁신의 유산과 숙제들을 이어 받아 능히 완수해 나갈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여야를 막론하고 힘주어 혁신을 외치는 주자들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도 혁신이 살 길이다.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속도와 양상으로 환경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런데 '망가지지 않는 한 고칠 필요가 없다'는 자세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망가지는 것,간단히 말해 고장이 나면 그 때 가서 손보면 된다는 무모한 실용주의는 결국 수구적 보수성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고장이란 종종 고칠 수 없는 결함이 드러나는 현상인 경우가 많다.

겉으론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미 오래된 암 덩어리인 경우와 같다.

암의 경우 통증 등 증상을 느끼게 되면 이미 손 쓸 수 없는 단계인 경우가 많은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 후라면 뒤늦게 뜯어고친다고 법석을 떨어봐야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되어 버리고 만 후에 고치면 무슨 소용이 있나.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혁신만은 지속돼야 한다. 세계적인 경영전략가로 손꼽히는 오마에 겐이치는 말한다.

'망가지지 않는 한 고칠 필요가 없다'는 속담은 결국 복지부동과 정체(停滯)로 이어질 뿐이라고.혁신은 정권이 바뀔때마다 붙였다 떼는 '일회용 반창고'여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