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다국적 제약사 화이자는 한국에 2012년까지 3억달러 규모의 연구개발비(최근 환율로 계산하면 약 2800억원)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나라 상위 매출 10대 제약사들의 평균 연간 연구개발비가 대략 200억원 내외이고 보면 우리 입장에서는 큰 투자가 아닐 수 없다.

화이자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화이자의 지난해 매출액은 48조원에 이른다. 이런 거대 다국적 제약사들이 대개 매출액의 15~20%를 연구개발에 투자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화이자의 한국 투자는 여기저기에 씨앗을 뿌려놓는 그런 수준이다.

그러나 규모에 상관 없이 이유 없는 투자는 절대 없는 법이다. 화이자의 제프 킨들러 회장은 이번 투자 결정의 근거가 뭐냐는 질문에 한국의 기술력,인력,정부 정책,과학기술 투자 등을 들었다. 과연 한국 쪽 요인들만으로 화이자는 그런 투자 결정을 했을까.

요즘 다국적 거대 제약사들도 고민이 많다. 이른바 '혁신 결핍증'이다. 연구개발비는 매년 급격히 증가하고 있지만 성공하는 신약 수(예컨대 미국 FDA 승인 신약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현재 잘 팔리고 있는 소위 블록버스터(blockbuster)들의 특허가 계속 만료되고 있는 상황이라 이들의 마음은 더욱 초조하기만 하다.

이런 거대 제약사들도 자체 역량만으로 신약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자 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공동 연구,아웃소싱,라이선스-인(license-in) 등 전략적 제휴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스스로 필요해서 연구개발 분업 구조를 구축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벤처로 출발하여 라이선스 전략으로 단기간에 거대 제약사 반열에 오르는 기업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다.

이제 국내 제약산업 얘기 좀 해 보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이후 제약산업 위기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허가-특허 연계,공개자료 보호 등 지식재산권 강화와 관세 철폐 등으로 앞으로 10년간 연평균 904억~1688억원의 생산(매출) 감소가 예상된다는 게 연구기관들의 분석이고 보면 그런 우려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내 제약사들이 별다른 대응 노력을 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정부가 어제 제약산업 지원 방안을 내놨다. 업체들도 자체적인 전략 짜내기에 골몰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중대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잘하면 국내 시장을 타깃으로 한 그동안의 제네릭 의약품(특허가 만료된 의약품에 대한 복제 의약품) 중심에서 벗어나 제네릭(개량신약 포함)의 해외시장 개척,앞서 언급했던 국제 연구개발 분업 구조를 활용한 라이선스 전략 등 이른바 '전략의 다각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수·합병 욕구가 분출하고 대기업들의 여유 자금이 밀려들면 제약산업의 구조 개편이 일어나고 제약산업에 대한 인식도 확 바뀔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 보면 신약 개발을 주도할 수 있는 글로벌 제약회사 탄생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다.

1987년 국내에 도입된 물질특허 제도는 신약 개발의 동기를 제공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한·미 FTA가 제약산업의 구조 개편과 전략 다각화의 동기로 작용한다면 한·미 FTA로 인한 수혜 업종,피해 업종에 대한 현재의 전망은 10년 뒤 완전히 뒤바뀐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안현실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