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사를 이끌고 있는 한국인 구혜영 대표(44)가 중국계 싱가포르 직원들과 전략회의를 하고 있다.
새로 시작한 지문인식 도어록 제품의 필리핀 및 인도네시아 판매를 위한 아이디어 회의다.
"'한류'덕에 동남아 지역에서 한국산 제품에 대한 평가가 좋습니다.
동남아 각국에 판매망을 구축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구 대표는 싱가포르에 몇 안되는 한국계 여성 기업인이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현지 한국계 기업인 모임인 싱가포르 한인상공회의소에서도 단연 화제가 되고 있다.
별다른 자본과 기술 없이 열정과 성실함만으로 남다른 브랜드 가치를 살려내고 있어서다.
구 대표가 싱가포르에 정착한 것은 20여년 전.대학에서 문예창작과를 전공한 그는 싱가포르 소재 미국계 기업의 문을 두드렸다.
한국 내 취업보다는 외국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단다.
외국에서의 '샐러리우먼' 생활에 적응하던 그는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싱가포르는 남녀 차별이 전혀 없어 충분히 자기 사업을 해볼 수 있다는 것."한국에서는 여자가 사업차 만나자고 하면 이상하게 여기는 풍토가 있지요.
하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첫 사업으로 디자이너 한명을 두고 카탈로그 등을 제작하는 소규모 광고업에 손을 댔다.
한동안은 재미를 봤지만,결국 20만싱가포르달러(SGD·1억2000여만원)의 빚을 지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
구 대표는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서 싱가포르인 친구에게 돈을 빌려 재기에 나섰다.
고민끝에 그가 두번째로 택한 사업 아이템은 한국산 다이아몬드공구(절삭공구)를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으로 들여와 동남아지역에 판매하는 것."품질과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국제적 매뉴얼 등을 갖추지 못한 한국 중소기업의 제품에 선진 마케팅 기법을 접목시켜 동남아지역에서 판매하는 것이었지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태국 등 동남아 각국과 중동의 건설현장을 쉼없이 찾아다녔다.
싱가포르와 달리 중동 등지에서는 여자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이어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심지어 "건물 기둥도 올라가기 전에 여자가 건설현장에 발을 들여놓았다"며 만남조차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구 대표는 이에 굴하지 않고 팸플릿과 매뉴얼 등을 벗삼아 건설현장을 누비며 한국산 제품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또 '이화다이아몬드공업' '신화다이아몬드' 등 한국의 관련 업체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온다습한 동남아 건설현장에 적합한 공구들을 만들어내는데 주력했다.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초기 50만달러 수준이던 사업 규모가 400만달러까지로 커졌다.
1997년 동남아를 휩쓴 IMF 외환위기 당시 연간 매출액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위기를 겪었지만,제조업체인 한국기업들과 힘을 모아 슬기롭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구 대표는 5년 전부터는 한국 '신성기계'가 제작하는 식품포장기계를 들여다 판매하는 사업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대했다.
단일품목에 집중해 위기를 맞기보다는 다각화를 통해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서다.
최근 싱가포르 최대 규모의 밀가루 제조업체에서 설립하는 라면공장에 물류자동화 라인을 구축하는 600만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따내는 등 신규사업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기술력은 있지만 국제적 마인드가 부족한 한국 중소기업들의 제품을 세계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게 구 대표의 설명이다.
급기야 구 대표는 지난해 부도를 낸 국내 중소기업을 인수,제조업에도 뛰어들었다.
한국 기업들이 생산한 제품을 OEM으로 가져와 파는 데 그치지 않고,연구개발 및 생산까지 직접 해보겠다는 생각에서다.
한국 내 자재비용이 지나치게 높다고 판단한 구 대표는 연구개발(R&D)은 한국에서 하고 부품조달 및 생산은 싱가포르에서 하는 이원화 전략을 추진키로 했다.
싱가포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액은 한국의 1.5배이지만,인건비는 한국의 절반 수준이라는 점도 고려했다.
구 대표는 사업 성공의 비결로 '열정'을 꼽았다.
"원하던 일이 안됐다는 것은 그것이 이뤄질 만큼 간절히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열정이 식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게 몸에 배게 됐다고.
"동남아 시장을 잘 둘러보면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 복덩어리가 있습니다.
기술력과 열정이 있다면 한국산 제품을 갖고 얼마든지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싱가포르=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