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TV.더타임스 이어 WSJ까지 "돈되면 뭐든지…" 선정주의 비판도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이 세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미국 최고의 경제신문 월스트리트저널이 머독의 손아귀에 반쯤 들어갔다는 소식 때문이다.

미국 최대 그룹인 GE와 파이낸셜타임스의 소유주인 피어슨그룹이 잠깐 인수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이내 계획을 접었다.

머독은 "모든 것이 끝났고 대주주인 밴크로프트 가문의 최종 승인만 남았다"고 자신했다.

루퍼트 머독은 호주의 자그만 신문사를 반 세기 만에 세계 굴지의 미디어 제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울타리 안에 있는 미디어 관련 기업만 52개국 780여개에 달한다.

이 정도면 '경영의 신(神)'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머독을 '명품 최고경영자(CEO)'로 대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비난의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런 평가의 대부분이 그의 경쟁 회사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그의 성공은 지나치게 저평가된 측면이 있다.

1931년 호주에서 태어난 머독은 옥스퍼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데일리 익스프레스'라는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한다.

1952년엔 아버지로부터 호주 애들레이드시의 조그만 신문사 두 곳(애들레이드 뉴스와 선데이 메일)을 물려받으면서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을 걷는다.

머독은 사업 초기부터 '정론지'보다는 '대중지'를 지향했다.

'여왕,쥐를 먹다'와 같은 파격적인 제목을 달기 일쑤였고 경제나 정치 기사보다 스캔들이나 범죄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각종 경품 행사로 독자를 끌어모으는 데도 열중했다.

머독의 진면목은 다른 언론사를 하나 둘 사들이면서부터 나타났다.

1960년 시드니의 '데일리 미러'를 인수한 뒤엔 영국으로 건너가 '뉴스오브더월드' '선' '더 타임스' '선데이타임스' 등을 줄줄이 바구니에 담았다.

1976년부터는 세계 최대 언론 시장인 미국 공략에 나섰다.

'뉴욕포스트'를 사들인 뒤에 '20세기 폭스 영화사'도 인수했다.

'폭스TV'를 새로 만들었고 홍콩 '스타TV' 등 세계 곳곳에 위성TV 회사도 세웠다.

돈이 된다고 판단되면 업종을 가리지 않았다.

1998년 미국 프로야구단 'LA다저스'를 사들였고 같은 해 9월엔 영국 명문 축구단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 인수 제안서를 내기도 했다.

정보기술(IT) 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싸이월드'에 해당하는 미국의 '마이스페이스닷컴'과 온라인 게임업체 IGN 등을 손에 넣었다.

머독의 '미디어제국 확장사'는 이처럼 일일이 다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다음엔 어디로 튈지 방향을 종잡기도 힘들다.

하지만 '이익 극대화'라는 한 가지 분명한 판단 기준이 숨어 있다.

그가 인수한 언론사들이 철저하게 흥미 위주의 보도 방식을 고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애들레이드 뉴스'를 운영할 당시 그는 매일 신문 3면에 반라의 여자 사진을 실었고 영국 '런던타임스'를 인수했을 때는 기자의 30%를 선정적 보도에 익숙한 타블로이드 출신으로 교체했다.

영국의 칼럼니스트인 앨런 왓킨스는 "머독은 저널리즘을 연예 사업의 한 분야로 개척한 사람"이라고 촌평했다.

'폭스TV'도 전파를 타자마자 잔인한 범죄 현장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캅스'와 같은 '화끈한'(?)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머독이 월스트리트저널에 군침을 흘리는 것도 결국 '돈'이 가장 큰 원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이 다른 신문과 차별화되는 첫 번째 요인은 주고객이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기업이라는 점.그만큼 구매력이 높다는 얘기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일찌감치 온라인 콘텐츠 유료화 전략에 나섰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현재 인터넷 유료 회원만 80만명을 웃돈다.

각종 뉴 미디어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월스트리트저널과 같은 구(舊)매체의 주가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있다는 점도 투자 욕구를 자극했다.

올해 후반기에 선보일 '폭스 비즈니스뉴스 채널'이 성공하기 위해서도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생산하는 고급 정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미국 내 2위의 판매 부수를 자랑하는 월스트리트저널을 인수함으로써 얻게 되는 정치적 영향력에 주목하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머독에게는 정치적 영향력도 돈을 버는 데 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사업의 걸림돌인 정부 규제를 피해가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줏대 없이 변절을 일삼는다는 반대파의 비판도 돈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하면 오히려 매우 일관된다. 머독은 젊은 시절 공산주의에 심취했다.

옥스퍼드대학 기숙사에 레닌의 흉상을 모셔놨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부터는 냉철한 자본가로 180도 변신했다.

영국 언론시장에 진출했을 때도 처음엔 마거릿 대처 총리의 보수당을 열렬히 지지했다.

독점금지법에 걸려 더 이상 신문사 인수가 어렵게 됐을 때 그를 구원해준 것은 바로 대처와의 이 같은 밀월관계였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난 뒤 보수당에 대해 영국 국민들이 염증을 느끼자 재빨리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으로 말을 갈아탔다.

미국에서도 권력과 여론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9·11테러로 국민 정서가 보수주의자로 기울자 머독은 미 공화당의 네오콘(신보수주의)들을 적극적으로 밀기 시작했다.

'폭스뉴스' 채널을 통해 연일 '애국적' 보도를 쏟아냈다.

호주 사람이 미국 방송을 다 먹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아예 국적을 미국으로 바꿔버렸다.

2003년 이라크전 이후엔 아예 부시 행정부의 대변인처럼 행동했다.

그런 보도가 민심에 부합한다는 판단에서다.

머독의 생각은 적중했다.

결국 '폭스뉴스'는 설립된 지 10년도 되지 않아 선발주자였던 CNN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적을 낳았다.

머독의 이런 막무가내식 전략은 경쟁사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빚에 시달리면서도 디즈니가 ABC방송을 사들이게 했고,타임이 워너와 합치도록 유도했다.

모두 머독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결과다.

최근 미국 최고의 권위지로 인정받는 뉴욕타임스가 머독에 대해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인신공격성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머독이 월스트리트저널마저 황색저널로 물들이며 죽기살기식 총공세로 나올 경우 뉴욕타임스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거칠 것 없는 머독이지만 가정사만은 마음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얻은 6명의 자식 사이에서 분란이 끊이지 않는다.

나이가 벌써 팔순을 바라보지만 아직 후계구도도 정하지 못했다.

첫째아들 래클란은 머독의 40살 연하 셋째 부인 웬디 덩과의 불화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둘째아들 제임스가 후계자 1순위로 떠올랐지만 아직 최종 낙점을 받은 상태는 아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