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굴지의 섬유·화학회사인 도레이의 오가와 미치오 고문(68)은 칠순을 이태밖에 남겨 두지 않았지만 아직도 '현역' 못지않다. 2002년 7년간의 임원 생활을 마감했지만 상임 고문으로 위촉돼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경영 자문과 대외 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것. 1963년 입사한 오가와 고문은 44년째 도레이에서 월급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의 소중한 경험을 회사 측이 인정해 준 결과다. 물론 임금은 한창 때에 비해서 보잘 것 없다. 이른바 '임금 피크 아웃' 대상이기 때문이다.

'야쿠르트 아줌마'로 유명한 한국야쿠르트는 독특한 방법으로 간부 사원들의 정년을 사실상 늘려주고 있다. 이 회사는 700여 대리점 가운데 20년 이상 근무한 팀장급 이상 간부 사원들을 대상으로 공정한 평가를 거쳐 기존 대리점을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회사에 기여도가 낮은 간부들에겐 기회가 원천 봉쇄되지만 말이다. 현역들은 회사의 이런 안전장치 때문에 한눈 팔지 않고 더 열심히 일한다. 퇴역도 마찬가지다. 회사의 '사은'에 실적으로 '보은'하려 노력한다.

기업의 인사 제도는 최적의 효율을 추구하면서 진화한다. IMF 외환위기 때 이식된 미국식 정리해고제를 새롭게 조명해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숙련 근로자를 오래 활용하는 방안이 종국엔 기업과 국가 경쟁력에 득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무대로 해서다. 한때 정리해고제는 '스피드 경영'이란 이름으로 포장돼 무능한 최고경영자(CEO)에게 면죄부를 줬던 터라 이런 기류 변화는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임금피크제가 대기업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게 이런 기류 변화의 증거다. LG전자,LG필립스LCD,LG마이크론 등 LG그룹 전자 계열사들이 올해 임금·단체협상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서 '구조조정=위기 해법'이라는 방정식에 의문 부호를 던졌다. 이들 LG그룹 계열사는 모두 정년을 55세에서 58세로 연장하고 55세를 정점으로 매년 10%씩 임금을 삭감하는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를 채택했다. LS전선도 △정년을 58세에서 60세로 연장하고 △53세부터 임금 인상을 정지하며 △59,60세는 피크 당시 임금의 85%를 지급하는 형태의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임금피크제가 뿌리 내리는 토양은 인구 고령화와 높은 인건비 부담이라는 척박한 인력시장 구조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기업 입장에선 숙련된 인력을 낮은 비용으로 활용할 수 있고,근로자 입장에서는 일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윈윈 게임'이다. 800만명으로 추정되는 베이비 부머(1955~1963년생)의 정년이 3년 후로 임박한 시점에서 이런 대안 프로그램이 나왔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미국식 정리해고제를 무조건 '사악한 잔꾀'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졸면 죽는' 뉴 비즈니스 영역에서는 정리해고가 때론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수 있다. 그러나 업력이 어느 정도 된 기업들은 구조조정이라는 마이너스 게임에서만 해법을 찾을 게 아니라 상생(相生)이라는 플러스 게임을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스피드 경영'의 반대말이 '슬로 경영'은 아니다. 스피드 경영을 보완하는 게 슬로 경영일 수 있다.

남궁 덕 산업부 차장 nkdu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