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꼬마 농군과 장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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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시인 >
아이는 꼬마농군이다.
장딴지와 팔뚝이 땅속 고구마 알처럼 튼실한 아이를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꼬마농군,올해는 작황이 어떨 거 같은가?" "장마가 오기 전에 감자를 수확해야 겠지?" 이런 식이다.
엄마 아빠를 따라온 또래 아이들이 흙반죽으로 만든 케이크 위에 꽃장식이나 하며 놀고 있을 때 아이는 제 몸보다 훨씬 큰 삽자루를 끌고 다니며 사사건건 말참견을 하곤 한다.
어디서 배웠는지 방울토마토 지지대가 너무 약한 것 같다,감자꽃이 폈을 때는 꽃을 꺾어줘야 한다,작물들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큰다는데 이렇게 게을러서야 되겠느냐.한번은 내 게으름을 탓하듯 몸소 호미를 손에 쥐고 밭고랑에 무성한 풀들을 뽑아내는 시범을 보이기까지 했다.
가까운 지하철역 부근에 몇 평 땅을 얻어 주말농장을 시작한 뒤부터 나는 이 꼬마 농군을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
"씨앗을 뿌리고 나서 흙은 얼마나 두껍게 덮어야 하지?" 그러면 아이는 숫제 뒷짐까지 진 채 제법 농군다운 지도편달을 아끼지 않는다.
"그야,너무 답답하지 않을 정도면 되지요."
엄마 아빠와 함께 텃밭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벌써 여러 해가 돼가는 아이는 그야말로 주말농장의 베테랑 농사꾼이다.
모종은 언제 심으면 좋으냐고 물으면 배꽃이 피기 전이 좋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할 줄 아는 아이를 든든한 후원자로 나의 농장은 점점 푸르러 갔다.
잘 차린 밥상이라도 찾아오듯 무당벌레와 애벌레가 끓었고,미처 통성명을 못한 식객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첫농사 치고 그만하면 대성공이었다.
내가 언제 누군가에게 이렇게 내 땀을 흘려 지은 밥상을 차려준 적이 있었던가.
장맛비가 오기 몇 주 전 날이 가물었다.
화약 냄새가 나는 땡볕 아래 채소들의 뿌리가 타들어가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적잖이 걱정이 됐다.
텃밭도 텃밭이지만 엄한 시어머니 같은 꼬마농군의 잔소리가 딴은 그립기도 했다.
그 사이 회사 일을 핑계로 몇 주째 나는 텃밭에 소홀해 있었던 것이다.
퇴근과 동시에 저문 텃밭을 찾았다.
예상했던 대로 밭은 내 어머니의 발뒤꿈치처럼 붉은 속살이 보일 정도로 쩍쩍 갈라져 있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한번도 찾지 않았다니! 어머니 생각까지 겹치면서 자책감이 마구 몰려왔다.
텃밭 옆에 있던 수도로 갔다.
수도꼭지를 틀었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수도가 끊긴 모양이었다.
텃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웅덩이가 있었지만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고,거기까지 가서 물을 떠올 생각을 하니 좀처럼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웅덩이로 이어진 풀숲길을 누군가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제 힘으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물통을 양손에 들고 거의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기진맥진 풀숲을 헤치며 텃밭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아이.꼬마농군이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했던지 아이의 바지는 온통 흙투성이었다.
날이 다 저물었는데 무섭지도 않으냐며 물통을 건네받는 내게 아이는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텃밭에 물을 줘야 하는데 웅덩이까지 갔다 오는 길에 애써 길어온 물을 거의 다 쏟아버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의 이마에 흥건하게 고인 땀을 훔친 뒤 아이를 업고 웅덩이까지 이어진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장자 '천지편'에 나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물을 긷는 편리한 기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밭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채소들의 마음을 잊어버릴까봐 웅덩이 물을 직접 퍼올렸던 노인의 이야기.그 노인과 아이의 마음이 전혀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몇 번이나 오르내렸던지 비가 오지 않아 팍팍했던 길은 아이가 엎지른 물로 촉촉하게 적셔져 있었다.
장자 이야기 대신 나는 아이에게 길섶에 핀 풀들을 가리켰다.
멀뚱하게 쳐다보는 아이도 언젠가는 이해할 것이었다.
자신이 쏟아버린 물이 자신이 걸어온 길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음을.텃밭의 갈증과 길섶에 핀 풀들의 갈증이 다른 것이 아님을.
아이는 꼬마농군이다.
장딴지와 팔뚝이 땅속 고구마 알처럼 튼실한 아이를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꼬마농군,올해는 작황이 어떨 거 같은가?" "장마가 오기 전에 감자를 수확해야 겠지?" 이런 식이다.
엄마 아빠를 따라온 또래 아이들이 흙반죽으로 만든 케이크 위에 꽃장식이나 하며 놀고 있을 때 아이는 제 몸보다 훨씬 큰 삽자루를 끌고 다니며 사사건건 말참견을 하곤 한다.
어디서 배웠는지 방울토마토 지지대가 너무 약한 것 같다,감자꽃이 폈을 때는 꽃을 꺾어줘야 한다,작물들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큰다는데 이렇게 게을러서야 되겠느냐.한번은 내 게으름을 탓하듯 몸소 호미를 손에 쥐고 밭고랑에 무성한 풀들을 뽑아내는 시범을 보이기까지 했다.
가까운 지하철역 부근에 몇 평 땅을 얻어 주말농장을 시작한 뒤부터 나는 이 꼬마 농군을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
"씨앗을 뿌리고 나서 흙은 얼마나 두껍게 덮어야 하지?" 그러면 아이는 숫제 뒷짐까지 진 채 제법 농군다운 지도편달을 아끼지 않는다.
"그야,너무 답답하지 않을 정도면 되지요."
엄마 아빠와 함께 텃밭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벌써 여러 해가 돼가는 아이는 그야말로 주말농장의 베테랑 농사꾼이다.
모종은 언제 심으면 좋으냐고 물으면 배꽃이 피기 전이 좋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할 줄 아는 아이를 든든한 후원자로 나의 농장은 점점 푸르러 갔다.
잘 차린 밥상이라도 찾아오듯 무당벌레와 애벌레가 끓었고,미처 통성명을 못한 식객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첫농사 치고 그만하면 대성공이었다.
내가 언제 누군가에게 이렇게 내 땀을 흘려 지은 밥상을 차려준 적이 있었던가.
장맛비가 오기 몇 주 전 날이 가물었다.
화약 냄새가 나는 땡볕 아래 채소들의 뿌리가 타들어가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적잖이 걱정이 됐다.
텃밭도 텃밭이지만 엄한 시어머니 같은 꼬마농군의 잔소리가 딴은 그립기도 했다.
그 사이 회사 일을 핑계로 몇 주째 나는 텃밭에 소홀해 있었던 것이다.
퇴근과 동시에 저문 텃밭을 찾았다.
예상했던 대로 밭은 내 어머니의 발뒤꿈치처럼 붉은 속살이 보일 정도로 쩍쩍 갈라져 있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한번도 찾지 않았다니! 어머니 생각까지 겹치면서 자책감이 마구 몰려왔다.
텃밭 옆에 있던 수도로 갔다.
수도꼭지를 틀었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수도가 끊긴 모양이었다.
텃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웅덩이가 있었지만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고,거기까지 가서 물을 떠올 생각을 하니 좀처럼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웅덩이로 이어진 풀숲길을 누군가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제 힘으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물통을 양손에 들고 거의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기진맥진 풀숲을 헤치며 텃밭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아이.꼬마농군이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했던지 아이의 바지는 온통 흙투성이었다.
날이 다 저물었는데 무섭지도 않으냐며 물통을 건네받는 내게 아이는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텃밭에 물을 줘야 하는데 웅덩이까지 갔다 오는 길에 애써 길어온 물을 거의 다 쏟아버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의 이마에 흥건하게 고인 땀을 훔친 뒤 아이를 업고 웅덩이까지 이어진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장자 '천지편'에 나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물을 긷는 편리한 기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밭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채소들의 마음을 잊어버릴까봐 웅덩이 물을 직접 퍼올렸던 노인의 이야기.그 노인과 아이의 마음이 전혀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몇 번이나 오르내렸던지 비가 오지 않아 팍팍했던 길은 아이가 엎지른 물로 촉촉하게 적셔져 있었다.
장자 이야기 대신 나는 아이에게 길섶에 핀 풀들을 가리켰다.
멀뚱하게 쳐다보는 아이도 언젠가는 이해할 것이었다.
자신이 쏟아버린 물이 자신이 걸어온 길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음을.텃밭의 갈증과 길섶에 핀 풀들의 갈증이 다른 것이 아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