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여년 동안 삼성그룹 내에서 '기업 인수·합병(M&A)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문율이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쟁쟁한 글로벌 기업들이 M&A를 통해 미래성장을 도모하는 가운데서도 삼성은 M&A에 나서지 않았다.

삼성은 대신 '독자 성장전략'을 채택했다.

M&A를 통해 외부에서 성장의 동력을 끌어오기보다 내부에서 연구개발(R&D) 투자와 핵심 인재 확보를 통해 신수종 사업을 발굴하는데 주력해왔다.

이런 전략으로 삼성전자는 반도체 휴대폰 LCD 등에서 세계 최고기업으로 성장했고 조선,화학 등에서도 톱 클래스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이 M&A를 새 성장전략으로 추진키로 한 것은 "내부 동력만을 이용한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기존 주력 사업을 이어갈 5∼10년 후의 신수종 사업 발굴이 여의치 않고,성장성이 큰 시장은 이미 해외 선진기업들이 선점하고 있어 새 성장동력을 찾기가 힘들다는 점에서다.

삼성그룹이 M&A에 마지막으로 나섰던 때는 1995년이다.

삼성전자는 당시 미국 3대 PC회사 중 하나였던 AST를 인수했다.

PC사업 기반이 전혀 없었던 삼성전자는 AST 인수를 통해 미국과 중국 시장 점유율을 일거에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수 직후 AST의 연구개발 인력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삼성전자는 5년 만인 1999년에 총 5억6000만달러의 투자자금을 포기하고 AST의 경영권을 포기했다.

결국 AST 인수실패를 계기로 삼성그룹은 더이상 M&A를 시도하지 않았다.

삼성은 이후 M&A를 하지 않는 대신 막대한 시설 투자와 R&D 투자를 통해 주력사업의 성장을 꾀했다.

문제는 이 같은 투자를 통한 성장이 2004년 이후 정체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데 있다.

지난해 그룹 전체 매출은 141조원으로 10년 전인 1987년(13조5000억원)에 비해 10배 이상 늘었지만 최근 3년간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여기에 해외 선진업체들이 보유한 특허기술을 피해 새로운 기술개발로 활로를 뚫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넓은 의미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이 최근 5년간 800억달러 규모의 M&A를 펼치고 구글이 최근 10억달러 규모의 M&A를 통해 고속성장을 이뤘다"며 "M&A를 통한 성장전략을 택한 기업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삼성에 자극제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자금+기술'을 통한 자체 동력만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이 삼성그룹이 M&A 전략을 채택하게 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삼성이 M&A를 새 성장전략으로 추진하지만 지금까지의 '자체 성장동력 창출' 전략을 포기하는 상황까지 점치기는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전자 조선 화학 금융 등 그룹의 각 사업부문이 아직까지 건재한 데다 M&A를 통해 시급히 확보할 만한 전혀 새로운 사업분야도 아직까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그룹 고위 관계자도 "M&A는 계열사별 상황에 따라 꼭 필요하다면 할 수 있다"고 전제를 깔았다.

따라서 삼성은 일부 계열사를 중심으로 M&A를 통해 기존 주력 사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쪽에 무게를 둘 것으로 보인다.

가장 먼저 삼성전자가 M&A에 나설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조만간 원천특허기술을 보유한 해외 IT기업 인수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인수 대상은 최근 삼성전자가 신수종 사업으로 정해놓은 시스템LSI(비메모리) 반도체 회사나 휴대폰 관련 회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중공업도 M&A에 뛰어들 가능성이 높다.

삼성그룹에서는 부인하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삼성중공업이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 뛰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삼성중공업이 거제조선소를 갖추고 있지만 향후 수주 물량이 급증함에 따라 선조 설비를 확충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고,대우조선해양 인수로 해외 고정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최근 대산석유화학단지 내실화 작업을 서두르고 있는 삼성토탈도 공격적인 M&A에 나설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삼성토탈은 그동안 자체 성장동력 발굴로 2003년 2조원이던 매출을 지난해 3조2000억원대로 늘렸지만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선 매출 10조원 이상으로 덩치를 키워야 한다 필요성이 제기돼왔다.

따라서 시장에서는 삼성토탈이 '규모의 경제'를 갖추기 위해 내년 이후 국내 또는 해외 업체 인수에 나설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