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4월,이준 열사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나기 직전,종로 YMCA강당에서 '생존경쟁'이란 주제로 연설을 했다.

"비록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빼앗긴 망국의 한(恨)이 가슴 한켠에 비수처럼 꽂혀 장차의 거사를 암시하는 듯하다.

따지고 보면 만국평화회의라는 것은 말이 좋아 평화회의지,기실은 열강제국들이 자신의 식민지 분할통치를 서로 용인하면서 국제적인 세력균형을 꾀하고자 하는 회의였다.

그런 까닭에 약소국이나 식민지의 권리가 고려될 여지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밀사로 갔다가 죽음을 택하게 되면 어느 누가 술잔을 놓고 청산에 와서 울어 주려나"하는 이준 열사의 결연한 독백이 나온 것도 이런 상황을 짐작했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는 회의참석은커녕 문전에서 온갖 박대와 수모를 당한 뒤,마침내 자신이 묵는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주말 헤이그 현지에서는 이준 열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이를 추모하는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지금도 풀리지 않는 열사의 죽음을 놓고 여러 얘기들이 오가고 있다.

자결이냐,병사냐,아니면 단식 순절이냐 하는 것인데,그와 함께 밀사로 파견됐던 이위종은 기자회견에서 "이준 열사는 순국했다"고 밝혔었다.

당시 일제는 열사의 순국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에서 얼굴의 종양이 악화된 단독(丹毒)설,심장마비설을 유포했었다.

그렇다고 만국사신 앞에서 피를 뿌려 자결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라를 구하시오.일본이 끝없이 우리를 유린하고 있소…"하는 열사의 유언에서 보듯,꽉 막힌 국제사회의 벽을 어찌하지 못하고 분사(噴死)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법조인으로서 구국운동의 선봉에 섰던 이준 열사에게는 고종황제와의 만남과 신임장을 받게 된 경위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신임장이 가짜라는 등의 소문으로 혹여 열사의 의기가 폄하될까봐 안타깝기만 하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