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炳住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합의안이 미국 의회에서 거부되거나 심의 자체가 장기간 연기될 상황을 맞고 있다.

혹자에 따라서는 "한국이 할 일은 다 했으며,미 의회 비준은 미국 대통령의 일이다"라고 한다.

틀리지 않은 얘기이다.

다만 의회 논의 과정에서 '한국은 연간 70만대의 자동차를 수출하면서 겨우 5000대의 미국 차를 수입한다'는 등 일방적인 한국 비판이 제기되고 언론 등을 통해 퍼져 나간다면 우리는 과연 강 건너 불 보듯 해야만 할 것인가? 인도는 말 많았던 2005년 미·인도 원자력협력 협정 체결 이후 미 의회 비준을 위해 미국 측 지지 세력과 연합해 대대적인 로비를 벌였다.

멕시코 역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후 워싱턴에서 유사한 정성을 기울였다.

의회 비준 성사의 목적도 있지만,비준 과정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비판의 목소리를 조절하고 자국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워싱턴에서 각국이 벌이는 로비와 관련해서 크게 네 가지 유형을 볼 수 있다.

첫째 워싱턴 로비가 뭔지 몰라서,아니면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믿거나 또는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해 아예 로비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나라들이다.

대부분의 개도국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에게 미국은 항상 먼 나라다.

둘째 로비라는 것이 뒤에서 몰래 돈으로 매수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어쩌다 한 번씩 무리수를 던지는 나라들이 있다.

한국도 1970년대 박동선 사건을 통해서 대표적인 케이스를 남겼다.

미국을 잘 모르는 나라들이다.

셋째 물적 자원은 넉넉해서 현지 로비스트를 충분히 고용하지만 자국 입장 개진에는 왠지 자신이 없고 수동적으로 현황 분석에만 집중하는 경우다.

1980~90년대 일본 및 우리나라 등이 해당된다.

한마디로 로비를 제대로 모르는 경우다.

네 번째는 워싱턴 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이에 동참해 미국 정치제도의 다원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나라들이다.

과거 이스라엘 대만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로 거론돼 왔지만,그 외에도 상당수의 서구 선진국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돈 거래를 통해서 안 될 일을 되게 하는 것은 불법 브로커가 하는 일이다.

날로 투명해지는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들의 설 땅은 점점 좁아지며 사라져가고 있다.

오늘날 선진국의 전문 로비스트가 하는 일은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현안을 적절하게 대의명분과 연결해서 정책 결정권자들이 쉽게 이를 소화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 선진 로비의 진수를 잘 이해하는 나라들은 워싱턴 다원주의 시스템 속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 나라들은 현지의 대사관과 경제단체 및 민간 기업 지부들이 유기적인 협조를 통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

특히 민간 단체들의 워싱턴 활동 수준이 현지에서의 국가별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다.

그런데 이에는 필수 전제 조건이 있다.

본국과 워싱턴 현지 팀 양쪽에 워싱턴 문화에 익숙한 전문가가 포진하고 이들 간의 원활한 팀워크 체제가 갖춰져야 한다.

그러한 팀워크에 더해 현지인 로비스트들을 고용하고 활용하는 삼각 체제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경제계는 워싱턴에서 어느 정도의 기반을 갖추고 있을까? 몇 개의 경제단체와 일부 대기업들이 현지 지부를 두고 활동하지만,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하겠다.

워싱턴 파견을 순환근무 원칙하에 돌아가면서 누리는 특혜 정도로 여기는 문화도 아직 상당히 남아 있다.

오랜 세월 현지에서 전문성을 쌓아야만 비로소 워싱턴 전문가로서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대만,싱가포르,사우디,그 외 상당수 나라들이 자타가 공인하는 민간인 워싱턴 전문가들을 보유하고 있다.

수십 년 간 현지에서 인맥과 기반을 구축한 인재들이다.

이제 한국도 민간 기업과 경제단체들의 워싱턴 활동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킬 시점이 됐다.

정부가 한·미 FTA 체결을 통해서 양국관계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면,이를 현실화하는 것은 민간 부문의 몫이다.

그것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었던 워싱턴'을 보다 가깝게 우리 쪽으로 끌어당기는 길이다.

/KL&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