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1907년까지 자동차 시장을 주도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이 해 프랑스의 자동차 생산량은 2만5000대로 영국의 10배였다.

세계로 수출되는 자동차의 3분의 2는 프랑스 제품이었다.

하지만 1908~1914년 사이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은 헨리 포드의 주도 아래 혁신적인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해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했다.

반면 과거에 왕실 마차를 제조하던 프랑스의 루이 르노는 자동차를 이런 방식으로 조립하는 것을 거부했다.

얼마 안지나 승패가 확연히 엇갈렸다.

1914년 미국은 48만5000대를 생산했고 포드는 미국 시장의 절반을 장악했다.

프랑스의 생산량은 미국의 11분의 1로 떨어졌다.


사례 2 자동차 대중화가 본격화된 1920년대 초.이제는 포드가 당할 차례였다.

당대 최고의 혁신가였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자만심이 슬슬 일었다.

그는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 준 검은색 세단 'T형 카'외에는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반면 경쟁사인 제너럴모터스(GM)는 캐딜락 뷰익 올즈모빌 폰티악 시보레 등 가격과 기능,디자인과 색상이 다른 차들을 쏟아냈다.

미국인들은 과감한 혁신으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 GM의 손을 들어주었다.

바야흐로 GM의 시대가 시작되는 분수령이었다.



환경 변화에 적응해 살아남느냐,도태하느냐는 비단 개인이나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도 똑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다.

고대 이후 동아시아의 변방이던 일본은 19세기 말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아시아의 패권국가로 발돋움했다.

'유럽의 지진아'로 불리던 아일랜드 역시 1980년대 외국기업에 대한 세금감면과 노사 간 사회적 협약으로 1인당 국민소득 4만5000달러(2006년 기준) 이상의 선진국에 진입했다.

반면 1930년대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던 아르헨티나는 정부의 계속된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과 부정부패로 2001년 국가파산(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며 후진국으로 추락했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과 결정적 전환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판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인들의 생각을 빌리면 이 같은 전환기는 카이로스(kairos)에 해당한다.

카이로스는 기존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단절적이고 극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로 극적인 변화 없이 그저 흘러가는 크로노스(kronos)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1945년 8월15일은 크로노스적 관점에서 봤을 때 수많은 날들 중의 하루에 불과하지만 카이로스의 잣대를 들이대면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치하를 벗어난 감격스런 날이다.

한국은 지난 20년간 두 차례의 전환점을 돌았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은 그 이전 산업화 과정에서 억눌린 시민사회의 욕구가 분출되는 통로였다.

1997년 외환위기는 정부주도 개발경제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였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카이로스를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이끌 주도국가가 될 것이냐,아니면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고 그저 그런 국가로 전락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선진국은 도망가고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신흥 개발도상국은 턱밑까지 추격하는 '샌드위치' 상황은 이 같은 상황을 표현하는 또 다른 말이다.

또한 카이로스는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변화의 바람이 워낙 거센 탓도 있지만 변화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의 흐름을 타지 못한 조직이나 기업은 금세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필름 카메라의 개선에만 신경쓰던 코닥이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쇠락한 것이나 '워크맨 신화'의 소니가 '아이팟'을 내놓은 애플에 단숨에 무너진 게 대표적 사례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중견 휴대폰업체들이 품질도 변변찮은 중국의 저가폰에 밀려 생사의 기로에 선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성기와 쇠락기 사이의 간격은 10년,20년이 아니다.

길어야 2년,3년이다.

2004년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내며 세계를 놀라게 했던 삼성전자가 불과 3년 만에 위기감에 휩싸이고 있지 않은가.

영화 '스파이더맨'의 사례는 요즘 일어나는 변화가 얼마나 단절적이고 불연속적인가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는 당초 2001년 말 개봉할 예정이었다.

제작사는 이를 위해 그해 여름 스파이더맨이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를 배경으로 활강을 하는 장면을 예고편으로 찍어뒀다.

하지만 그해 9·11테러로 월드트레이드센터가 사라지면서 이 예고편은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영화 개봉도 2002년으로 늦춰졌다.

테러라는 예외적 변수이긴 하지만 당시 영화사로서는 월드트레이드센터 빌딩이 사라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옥션의 전 창업주인 이금룡 디지털경제연구소장은 "지금 우리 경제는 지식 집약적인 제3의 물결에서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제4의 물결로 이동 중"이라며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무형자산과 소프트 파워가 경쟁의 승패를 가름한다"고 강조했다.

과거에는 경영학 교과서가 일러주는 대로 경영을 하면 됐지만 지금은 경영 현장에서 직접 교과서를 고쳐 쓰는 시대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만큼 카이로스적 전환은 긴박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세기적 대전환을 알리는 신호들이 손짓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그런 신호를 놓치고 있다면 앞으로 10년 후의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도 있다.

1945년 8월 예기치 못한 순간에 광복을 맞아 우왕좌왕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