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콤은 국내 이동통신업계 1위답게 평소 리스크 관리에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경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는 의사 결정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내리기 때문에 한 번 내린 결정은 좀체 번복되는 일이 없다.

하지만 SK텔레콤은 지난 7월2일 기업 인수·합병(M&A)과 관련된 중대한 사안을 돌연 취소해 시장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 반도체 설계업체인 에이디칩스를 인수한다고 발표한 지 불과 보름도 안 돼 이를 전격 취소키로 한 것이다.

시장 일각에서는 SK텔레콤답지 않은 '촌극'이라며 비난을 퍼붓는 한편 심지어 내부자거래 의혹까지 제기했다.

증권선물거래소는 공시 번복을 이유로 불성실 공시법인 지정을 예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평가는 전혀 달라진다.


SK텔, 에이디팁스 인수 제동...시장에선 '사외이사의 반란'화제

하이닉스.삼성전기 이사회도 주요경영 사안에 대해 잇따라 부결


전문가들은 SK텔레콤의 이번 인수 취소 결정을 오히려 선진 경영시스템의 승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왜 그럴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SK텔레콤의 에이디칩스 인수 시도부터 철회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자. 당초 이 회사 연구개발(R&D)을 담당하는 전략기술 부문은 SK텔레콤이 보유한 많은 지식재산권을 활용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에이디칩스 인수를 추진해 왔고 지난 6월 말 양사 간 협의에 따라 에이디칩스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형태로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SK텔레콤은 당시 이 같은 사실을 공시하면서 'M&A 계약의 특성상 향후 이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할 경우 계약이 해지될 수 있다'는 사실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이 계약이 취소될 것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었다. 과거 그런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열린 이사회에서는 이번 인수건을 놓고 참석한 이사진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전체 이사회 멤버 중 4분의 3을 차지하는 사외 이사들의 반대 목소리가 컸다. 이사회는 결국 사업 타당성을 검토한 결과 인수를 안 하는 쪽이 회사와 주주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 침묵을 지키거나 찬성표를 던지는 거수기 역할만 해 온 것으로 인식된 사외 이사들이 반란을 일으킨 셈이다. 정재규 기업지배구조개선센터 연구원은 "SK텔레콤으로선 인수 철회로 대외 이미지나 신뢰성에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번 결정은 이사회의 승리이며 선진 경영시스템에 비춰 보면 너무나도 정상적이고 충분히 가능한 결과"라며 "장기적으로는 주주들의 이익에도 도움이 되는 결과일 수 있다"고 말했다.

사외이사 제도가 국내에 도입된 시기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초다. 햇수로 따지면 올해가 10년째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외이사 제도는 겉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실제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한 상장 기업도 많지 않았고 사외 이사를 두고 있더라도 대부분 이사회 참석률이 낮거나 찬성표를 던지는 거수기 역할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외이사 제도에도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고 있다. 무엇보다 더 이상 거수기 역할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사외 이사들이 늘고 있다. 물론 이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신경 쓰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SK텔레콤 외에도 사외 이사가 경영에 적극 참여해 안건을 부결시킨 사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꽤 있다. 기업지배구조 평가에서 5년 연속 우수 기업으로 뽑힌 삼성전기도 대표적인 케이스다. 2006년 1월 삼성전기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정기 이사회에는 '대규모 투자'와 '사외이사 선임' 등 두 가지 안건이 올라왔다. 모두 5명으로 구성된 사외 이사들은 행정 법률 회계 경영 등 각 분야 전문가들로 참석한 임원들에게 "자금조달 계획은 면밀히 검토했는지" "제품수요 예측은 제대로 한 것인지" 등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담당 임원들은 질문에 대답하느라 쩔쩔맸다. 결국 이 안건은 다음 이사회로 미뤄졌고 '외부감사 선임' 건은 선임 기준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부결됐다.

SK㈜(현 SK에너지) 이사회도 2005년 5차 회의에서 자사주(우선주) 매입과 소각 안건을 놓고 치열한 격론을 벌였다. 사외 이사들은 경영진이 제시한 소각 주식수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고 이에 따라 소각 주식수는 당초 계획한 규모보다 줄어든 15만주로 수정됐으며 이 수정안도 이사회 표결에서 6 대 4로 간신히 가결됐다. SK에너지 사외 이사는 이에 앞서 당시 이규민 경영관리 담당 전무가 자금과 회계 업무를 함께 맡고 있는 것이 투명 경영과 윤리 경영에 위배된다고 지적했고 최태원 회장은 이를 받아들여 자금과 회계를 분리하도록 했다.

하이닉스 이사회도 2002년 마이크론과 합의한 매각 양해각서(MOU) 안건을 만장일치로 부결시켰다. 당시 매각을 무산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사회 멤버는 7명의 사외 이사들이었다. 사외 이사들은 매각보다는 독자 생존이 낫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결국 이 같은 결정이 오늘의 하이닉스 부활을 만들어 낸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