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채 < 문학평론가 >

신정아씨의 거짓말을 두고 나라가 온통 들썩거렸다.

사건의 진상이야 처음부터 가닥이 잡혀 있던 것이고,유쾌한 사기극 정도로 매듭짓고 넘어갈 일인 것 같은 데도,이 사건에 대한 관심의 집요함에는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어 보인다.

며칠 전 우리 동네 아저씨들의 수다 자리에서도 이 사건이 화제가 되었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느냐는 비분강개 파와,그런 거짓말이 통하는 우리 사회의 수준이 문제라는 현실개탄 파,교수 채용이나 광주 비엔날레 임원 선정에 뭔가 비리나 흑막이 있었으리라고 주장하는 음모론 파 등이 뒤섞여 주류 의견이 만들어졌다.

음모론만 빼놓으면 다들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신정아씨가 학력과 관련해서 거짓말을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고,그렇다면 아마도 신정아씨 주변 사람들이 그의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 갔다는 정도가 이번 사건의 실체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의 진상이 아니라,의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이야기가 아연 활기를 띠었다.

이번 사건은 학벌에 상관없이 누구나 일급 큐레이터와 좋은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학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만천하에 폭로한 일대 쾌거였다는 주장이 테이프를 끊었다.

한 여성 게릴라가 학벌 사회의 우스꽝스러움에 대해 단신으로 감행한 위대한 테러라는 주장이 그 뒤를 받쳤고,그렇게 거창한 거라기보다는,형편 없는 사회를 조롱하기 위해 한 몸을 내던져 만들어낸 위대한 개그가 아니겠느냐는,말하다보니 결과적으로 거창해진 이야기도 있었다.

우중충한 장마철이니 만큼 비분강개나 현실개탄보다는 농반진반의 이런 이야기 쪽이 좀더 재미있었고,또 맷집 좋은 사회를 두들기는 일이니 누가 뭐랄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 또 학벌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학벌 좋고 실력도 있는 사람이나,실력 없고 학벌도 안 좋은 사람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실력은 있는데 학벌이 안 좋은 사람들과,특히 학벌만 좋고 실력이 없는 인간들이 문제라고 한 아저씨가 목청을 높일 때,목을 외로 꼬거나 코를 만지작거리는,괜찮은 학벌을 가진 아저씨들이 몇이 있었다.

여하튼,학벌을 위조한 것은 한심한 일이지만 그래도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한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신정아씨도 그리 욕먹을 것은 아니라는 말이 나오면서부터는 마침내 아저씨들의 수다가 자기 수준을 드러냈다.

예쁜 여자라 관대한 것이다,예쁜 여자에게 어떻게 관대하지 않을 수 있느냐,딸 가진 아비들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 등등.

수다가 그렇게 절정을 넘어서며 시적시적 정리될 무렵,너희가 이번 사건의 진짜 비밀을 아느냐는 한 사람의 주장이 좌중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어떻게 그런 거짓말이 통할 수 있었겠느냐,능력 있고 인물도 언변도 좋고 했겠지만 그 핵심이 뭐냐,그것은 신정아씨의 영어 능력이다,학위를 못 땄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미국에서 그만큼 머물렀으면 영어만큼은 어느 정도 익혀서 돌아오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요지였다.

영어 이야기가 나오자 좌중이 숙연해졌다.

영어 콤플렉스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탓이다.

그래,사기를 치려고 해도 영어가 문제다.

그렇다면 신정아씨의 진짜 무기는 학벌 위조술이 아니라 영어 실력이었다는 것인가.

그런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고,어쨌든 화제는 일약 영어 교육과 자식들 사교육비 문제 등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화제가 바뀌자 맥주 맛이 쓰게 변했고,창 밖의 빗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위기는 확실하게 파장이 되었다.

구중중한 장맛비 속으로 나서며 아마도,자식들 영어 공부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시키겠다고 속다짐들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학벌 위조에 대해 말하는 쪽이 훨씬 더 유쾌했다는 것,영어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고,최소한 그 점에 관한 한 수다꾼 모두가 군말없이 합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날씨는 더 우중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