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만든 빵 버릴지언정…" 돈보다는 '명품의 길' 택했다
대한민국에서 제과점으로 이보다 더 성공한 사람이 있을까. '김영모 과자점'의 김영모 사장(54). 1982년 부인과 단둘이 차린 6평짜리 구멍가게 빵집 주인은 서울 강남의 4개 대형 점포에 직원 100여명을 두고 연매출 60억원을 올리는 '제빵신화'의 주인공으로 변신했다. 입맛 까다로운 강남 사람들에게 '김영모' 브랜드는 고급빵의 아이콘이 됐고,도곡동 타워팰리스 인근 그의 점포는 '타워팰리스 사람들의 전용 빵집'으로 통한다. 세계요리책 경연대회(Cook Book)에서 한국인으로 처음 디저트 부문 대상을 수상했고,2003년부터는 대한제과협회 회장도 맡고 있다.
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인력공단은 23일 김 사장을 '7월의 기능한국인'으로 선정했다. 고등학교 중퇴 후 17세에 시골 동네빵집의 속칭 '시다바리'로 불리는 보조로 출발,34년간 제빵 외길을 걸으며 '일가'를 이룬 그의 장인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17세 보조서 매출 60억 CEO로
김 사장 역시 '명장(名匠)'들이 지닌 직업 철학을 어김없이 갖고 있다. 대표적인 게 '잘못 만드는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잘못 만든 것을 파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것. 창업 초기 그는 당시 인기가 높았던 소보로빵(곰보빵)을 놓고 부인과 자주 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밀가루 한 포대가 아쉬웠던 때 소보로의 정량과 굽기 정도를 탓해 걸핏하면 만든 빵을 버리는 김 사장이 부인 입장에서는 몹시 못마땅했다. 한 번은 버려야 할 소보로빵을 부인이 김 사장 몰래 판매대에 올려 놓았다. "이를 보고 정말이지 대판 싸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보로 정량이 조금 부족했거나,거북이 등처럼 갈라져야 할 소보로 모양이 가뭄 뒤 논밭 갈라진 모양 정도의 차이였겠지요. 그러나 그런 원칙을 지켜왔기에 오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 사장이 한국 제과업계에 남긴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국내 최초로 천연발효 빵을 만든 것. 그러나 이 역시 '돈이 아니라 좋은 제품 자체가 목적'이라는 그의 철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독일에서 유산균 원종을 냉동 수입해 배양을 시도했지만,번번이 실패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양에 성공하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6년. "돈만이 목적이라면 그 많은 시간과 정열을 못 쏟았을 거예요. 인공 효모가 아니라 천연 발효로 만든 빵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해지는 불편함이 없어집니다. 점포 인근에 살다 이사간 단골들이 먼곳에서 다시 찾는 이유도 이 때문이랍니다." '돈'보다 '제품'을 추구한 것이 결국 더 큰 '돈'을 벌어다 준 셈이다.
그가 굽는 빵은 향기롭고 부드럽다. 그러나 그의 성장사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을' 정도로 불우했다. 1953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그는 돌도 채 안 돼 부모의 이혼으로 고아 아닌 고아가 됐다. 신문기자였던 인텔리 아버지와 무학의 시골 농부 딸이었던 어머니 간의 결혼생활은 오래 가기 어려웠다. 그 뒤 고모,숙모와 초등학교 졸업 때쯤 만난 새 어머니까지 그에게는 '4명의 어머니'가 있다. 빵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7세 때. 경북 왜관에 있는 이모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는 1학년을 마친 뒤 더이상 '눈칫밥' 먹기가 어려워 학교를 중퇴하고 동네 빵집의 보조로 취직했다. 초등학교 시절 진열장 너머로 설탕 가루가 솔솔 뿌려진 도넛을 바라보는 것에서 위안을 삼던 기억이 그를 빵집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2년간의 첫 빵집 생활에서 그가 얻은 것은 결핵. 금오산 작은 절에서 앞 못보는 노스님의 도움으로 몸을 추스린 뒤 서울 빵집으로 옮겼지만 타향살이는 혹독했다. 빵 대신 술이었고,결국 막걸리 잔을 들고 손까지 떠는 '반(半)폐인'이 됐다.
그런 그를 '사람 만들어 준 곳'은 군대였고,거기에서 그는 인생 최고의 '멘토'를 만난다. "내무반에 굴러다니던 다 낡은 책을 뒤적이다가 어느 한 구절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됐고,결국 제 인생을 바꿔 놓게 됐지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라,최악의 경우를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라,최악의 경우를 개선하라'는 구절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책은 카네기의 '행복론'이더군요."
국내 최초 천연발효 빵 만들어
그 뒤 술 담배를 끊고 틈나는 대로 제과기술 책을 탐독한 김 사장은 제대 후 보리수제과,나폴레옹제과 등 당시 유명 제과점에 들어가 하루 3시간씩 자며 빵 기술을 익혀 나갔다. 이 같은 그의 정열은 창업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김 사장의 요즘 자랑거리는 자신의 뒤를 이어 제빵사의 길을 걷고 있는 둘째 아들 영훈씨(26)다. 프랑스 명문 제과학교 리옹 제과기술학교를 나와 제과월드컵에서 2개 부문 우승까지 했으니 아버지로서는 그저 대견할 따름이다. 김 사장은 매주 일요일 교회에 나가 이렇게 기도한다. "제 아들과 함께 세계 최고의 제과점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글=윤성민/사진=김영우 기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