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야, 증권사야?'

요즘 은행원들의 자조섞인 푸념이다. 최근 은행들이 내놓은 신상품 목록을 보면 그런 푸념이 이해가 된다.

올 상반기 주요 은행들이 출시한 신상품을 조사한 결과,전체 신상품의 60% 이상을 펀드가 차지했다. 또 보험사 상품을 은행 창구를 통해 판매하는 방카슈랑스 신상품 비중도 15%에 달했다. 은행권 신상품 4개 중 3개 이상이 펀드와 방카 등 자산운용사나 보험사가 만들고 은행이 단순 판매 대행을 하는 상품이었다는 얘기다. 은행의 전통적 상품인 예금과 대출 신상품 비중은 각각 10% 안팎에 그쳤다.

◆판매대리점이 된 은행

국민 우리 신한 하나 등 7개 은행의 상반기 신상품 출시 실적을 집계한 결과,외환은행의 신상품 가운데 펀드 비중은 80%에 달했다. 우리 신한 하나은행이 출시한 신상품 중 펀드 비중도 60% 이상으로 압도적이었다. 그나마 국민과 기업은행의 펀드 비중이 30%대로 낮은 편이었다.

이는 전통적인 예금과 대출 영업이 여의치 않은데다 주식 열풍이 불면서 은행들이 판매 수수료 수입을 늘리기 위해 펀드 판매에 주력한 결과다.

신한은행의 펀드 판매 잔액은 상반기 중 4조4623억원 증가해 지난해 연말 대비 26.2% 급증했다. 외환은행의 펀드 판매 잔액도 상반기 중 25%나 증가했다.

은행권 관계자는 "예금 등으로 모은 돈을 자금이 부족한 곳에 대출해 주는 은행의 자금 중개 역할은 퇴색하고 자산운용사나 보험사에서 만든 펀드와 방카슈랑스를 대신 팔아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판매 대리점'으로 전락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6월 현재 펀드 판매사는 총 74개사로 이 중 증권사가 138조원,은행이 94조원의 판매잔액을 기록하고 있다.

◆밀어내기식 펀드 영업

펀드 상품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데다 예금이나 적금보다 상품구조가 복잡한 펀드의 특성상 상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파는 '불완전 판매'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 시중은행 지점 관계자는 "일주일에도 몇 개씩 펀드 신상품이 나오기 때문에 구체적인 펀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때 그때 은행이 '주력상품'으로 정해 주는 펀드를 기계적으로 팔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고객의 선택권을 고려하기보다는 은행의 계열 자산운용사에서 만든 펀드를 권하는 사례도 많다. 서울 서초구의 한 시중은행 창구 직원은 "수익률 가능성이 높거나 구조가 좋은 펀드보다는 수수료를 많이 받는 펀드 등 은행 입장에서 유리한 상품을 권하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놨다.

서병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은행의 이자이익 성장은 순이자마진 축소와 대출성장 한계로 인해 정체됨에 따라 은행이 안정적인 비이자 수익원 확보에 나서면서 펀드 등의 영업비중이 늘고 있다"며 "하지만 금융감독당국이 펀드 및 방카 판매수수료의 거품 빼기에 나서면서 이들 상품에 대한 판매 수수료도 안정적인 수익원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투자은행(IB) 강화나 해외시장 개척 등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기 위한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