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泳世 < 연세대 교수·경제학 >

정부는 최근 전기전자 4개,정보통신 6개,우주 5개,철강 6개 등 모두 44개 기술을 국가 핵심기술로 잠정 선정했다.

이는 다음 달 중순께로 예정된 산업기술보호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에서 최종 확정된다.

국가 핵심기술은 국가 예산으로 개발한 기술 중 해외 유출시 국가의 안전 보장 및 국민경제 발전에 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것으로 지난 4월 발효된 '산업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유출방지법)에 의해 지정된다.

유출방지법에 규정된 수출 절차 위반시 불법으로 간주해 처벌토록 돼 있으며 형량도 7년 이하 징역,7억원 이하 벌금으로 센 편이다.

수사 기관이 기술 유출 범죄를 적발해 처리한 건수는 해마다 늘어 지난해에는 237건에 달했다.

산업스파이 활동은 수법이 날로 다양화,지능화,음성화되고 있으며 규모도 대형화된다.

검찰 추산에 따르면 기술 유출을 막지 못했을 경우 입었을 피해액은 4년간 100조원에 달한다.

적발하지 못한 유출까지 고려한다면 별다른 자원 없이 수십 년간 축적된 연구 기술과 고급 인력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우리 경쟁력에 얼마나 타격이 될지 자명하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정부는 유출방지법을 부랴부랴 만들어 후속 조치를 취하고 있다.

법이 현실을 앞서가지 못하고 뒤따라가는 '뒷북치기'의 전형이지만 이제라도 국가 경쟁력의 원천을 지켜내려는 정부의 노력이 이뤄지고 있음은 다행이다.

하지만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첨단 원천기술이 매우 부족하다.

아직은 선진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선진 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현행 법은 대상 국가 간에 차별을 두지 않아 선진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를 제한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미국 일본 유럽으로부터의 기술 유입을 저해할 우려가 크다.

또한 현행 유출방지법은 기술에 여러 수준(layer)이 있음을 무시하고 있다.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기술이 있는가 하면 통상(通商) 카드로 써먹을 수 있는 하급 기술도 있다.

첨단 기술이나 원천 기술의 유출은 철저히 막아야 한다.

하지만 조립 검사 등 평범한 기술마저 통제한다면 본말이 바뀌어 경제 효율성만 낮추게 될 것이다.

현행 법하에서 하급 기술의 교류는 신고제도 때문에 장해를 받고 핵심 기술은 허가 없이 신고만으로 기술 이전이 가능해 제도 보완이 절실하다.

우리의 원천 기술은 미약한 반면 응용 기술이나 상용 기술은 세계적 수준이다.

중국을 위시한 개발도상국들이 곧바로 제품화가 가능한 한국의 상용 기술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이다.

특히 주요 산업이 중국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는 가운데 반도체는 한·중 간 격차가 가장 크다.

국정원이 적발한 사건 가운데 정보기술(IT) 관련이 73%에 달한다는 통계 수치는 IT 기술 유출 유혹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전·현직 연구원의 스카우트나 매수는 법적,도덕적 문제를 갖고 있어 최근에는 기업 간 인수·합병이라는 방법이 자주 쓰인다.

2003년 중국 비오이그룹이 현대전자(현 하이닉스) LCD 사업부문을 인수해 '비오이-하이디스'를 설립했지만 3년 후 빈 껍데기만 남긴 채 법정 관리를 신청했다.

와중에 비오이는 2005년 우리보다 한 세대 앞선 5세대 LCD패널 공장을 중국에 지었다.

비오이 그룹의 인수가 애당초 기술 빼가기를 노린 것이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 근거다.

중국 상하이자동차도 쌍용자동차 인수 후 핵심기술 유출에만 급급하다는 폭로가 있었다.

중국에 최첨단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하이닉스는 기존 공정마저 최첨단으로 전환 중이다.

더구나 최첨단 D램과 플래시 공정도 중국으로 이전하려 한다는 소문이다.

정부가 국토 균형발전을 들이대며 하이닉스의 이천공장 증설을 불허하면서 사실상 중국으로 내쫓은 꼴이었으니 하이닉스로서도 할 말은 있다.

하지만 하이닉스는 국민의 혈세로 살아난 세계 2위 메모리반도체 회사이며 국내외 2만5000개의 특허를 갖고 있다.

인수·합병이나 공장 이전으로 중국에 첨단 기술이 유출된다면 엄청난 국익 손실이 예상되는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