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반도체 생산기지인 삼성전자 기흥공장(경기도 용인)이 정전사고로 가동 중단된 것은 국내 반도체 산업 32년 역사에서 처음 벌어진 '사상 초유'의 사태라는 점에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리히터 규모 6.0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내진설계와 각종 안전장치 등을 갖춘 최첨단 공장에서 정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수요가 급증하면서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고 있는 플래시 메모리 생산라인에서 사고가 발생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실제로 이날 아시아 반도체 현물시장에서는 낸드플래시 거래가격이 제품에 따라 전날보다 6~7% 상승했다.

D램 가격도 소폭 올랐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고로 삼성전자의 플래시 메모리 생산에 차질이 빚어져 세계 반도체 시장의 수급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정전사고는 최근 실적만회를 위해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경영에도 적잖은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사고 왜 났나

삼성전자의 공식 설명은 배전반에 설치된 휴즈(변압기 차단기)가 끊기면서 정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변압기 쪽에서 문제가 생긴 것은 확실한데 정확한 사고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변압기에서 '순간 전압 강하' 현상이 일어나면서 정전이 발생한 것으로 사고원인을 추정하고 있다.

기흥공장의 한 직원은 "전력 송전과정에서 전압이 3만1000볼트로 떨어지는 순간 전압강하 현상이 나타나 배전반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전력을 공급하는 한국전력 측은 "이번 정전은 삼성이 기흥공장 내에 운용하고 있는 변전소의 배전 관련 설비의 문제"라며 "삼성이 지원을 요청하면 한전이 운용하는 신수원 변전소를 통해 즉각 도와주겠다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비슷한 설비를 운영 중인 하이닉스반도체 관계자들은 기흥공장의 정전사고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삼성과 한전 중 어느 쪽의 주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첨단 공정이 전개되는 반도체 사업장에서 정전이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흥사업장 내 엔지니어들도 사상 초유의 정전사고에 크게 당황해하고 있다.

◆피해규모 얼마나 될까

이날 정전사고로 기흥공장 K2 지역의 6개 라인이 가동을 중단함에 따라 피해 규모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흥공장은 기술·연구동(棟)이 들어선 K1 지역과 생산라인이 있는 K2 지역 두 곳으로 나뉜다.

이 중 이날 정전 피해를 입은 곳은 K2 지역으로,이곳에는 노어플래시를 생산하는 6·7라인과 낸드플래시와 D램을 생산하는 8·9라인,낸드플래시 전용 생산라인인 14라인,시스템LSI를 양산하는 S라인 등 총 6개 라인이 들어서 있다.

사고가 난 기흥공장은 삼성전자의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주력 생산기지라는 점에서 3분기 이후 낸드플래시 생산계획에 막대한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박현 푸르덴셜증권 연구원은 "최악의 경우 삼성전자의 3분기 낸드플래시 생산량이 15% 감소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삼성전자 관계자는 "현재 이들 6개 라인에는 월 평균 100만장,하루 평균 3만∼4만장의 웨이퍼를 투입한다"며 "정전으로 이날 투입한 웨이퍼의 약 30%를 폐기처분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일단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정전으로 가동이 중단되면 정전 당시 라인에 투입돼 있던 웨이퍼는 모두 전량 폐기해야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웨이퍼 한 장 가격이 평균 400만원이라고 봤을 때 하루 평균 최소 160억원 정도의 손실을 보는 셈이다.

회사 측의 예상대로 48시간 내 복구가 완료될 경우 이날 폐기한 물량을 포함해 생산차질로 인한 피해액은 약 400억원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복구가 예상보다 길어질 경우 피해 규모는 더 커지게 된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은 "이틀 안에 라인이 정상 가동되도록 복구할 수 있다"며 "일부에서 우려하는 수율(정상제품 생산비율) 회복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기흥공장이 복구되더라도 당분간 기존의 정상 수율(90%)을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완전복구는 언제쯤?

삼성전자와 업계에 따르면 이날 사고로 기흥공장 주요 라인의 클린룸과 첨단 세척장비가 오염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측은 3일 밤 11시20분께 모든 라인의 전력 공급을 정상화해 4일 오전부터 생산에 들어간다고 설명했지만 생산 라인의 완전복구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생산은 적정 온도와 습도 등이 최적화된 상태에서 이뤄져야 최적의 수율을 올릴 수 있어,전력이 복구됐다 하더라도 곧바로 가동을 재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에 정통한 관계자는 "정전이 발생했을 경우 라인 복구 프로그램이 즉각 가동되기 때문에 최대 5일 이내에 복구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복구하는 데 이보다 긴 시간이 걸릴 것이란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전으로 공기제어장치와 제조장비까지 가동이 멈췄다면 완전 복구하는 데 최대 열흘 이상 걸릴 수도 있다"며 "반도체라인은 특성상 30분 이상 정전이 되면 모든 라인이 불안해지기 때문에 다시 정상 가동하는 데 한 달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는 지난달 13일에도 K1 지역에서 15초간 정전사고가 발생했으나 라인이 가동 중지되지는 않았다.

조일훈/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