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열린 지난 8일.국제 금융시장은 벤 버냉키 미 FRB 의장의 입에 주목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우려를 다독일 만한 멘트가 나오긴 나올 텐데.그러나 버냉키 의장은 냉정했다.

"미국의 경제성장이 둔화될 리스크가 있지만 지금 가장 큰 관심은 인플레이션에 있다"는 말로 시장의 기대를 비켜갔다.

"서브프라임 부실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그동안의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버냉키의 견해는 맞아들어가는 듯 했다.

비실거리던 주가도 오름세를 탔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의 직격탄을 맞은 베어스턴스가 채권발행에 성공했다는 소식도 뒤를 이었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불안 심리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은행들은 혹시 모를 예금인출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다른 은행으로부터 돈을 꾸기에 바빴다.

은행간 금리는 FRB가 목표로 삼는 기준 금리를 훌쩍 넘어섰다.

영국 은행간 금리(리보)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최대은행인 BNP파리바가 보유펀드의 환매를 중단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유럽중앙은행이 긴급 지금지원에 나섰다. 미국 증시도 주저앉아 버렸다.

버냉키 의장도 곧바로 은행권에 긴급수혈조치를 취했다.

곳곳에서 '그린스펀'을 떠올렸다.

통계수치나 경제학 이론보다 직관을 중시했던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이라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진 지난 2월에 이미 손을 썼을 것이라는 가정이 잇따랐다.

버냉키 의장의 대처방법을 평가하긴 아직 이르지만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시장의 기대치에 어긋났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실기했다'는 논란도 불가피하게 됐다.

버냉키가 소신을 접고 자금지원에 나선 것은 대규모 예금인출사태,즉 '뱅크런(bank-run)'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단초는 BNP파리바발(發) 펀드환매요청이라는 '펀드런(fund-run)이었지만 뱅크런으로 확산될 것을 걱정한 것이다. 그러나 뉴욕타임스 등 주요 외신은 이번 자금지원 조치의 효과에 대해 의문부호를 달았다.

전통적인 뱅크런과 달리 이번 사태는 은행이 아닌 증권사로부터 촉발됐고 서브프라임의 부실 규모가 FRB의 예상보다 확대될 우려가 크다는 이유에서다.

'뱅크런'에 대처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은 은행에 충분한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07년 미국에서 처음 적용됐다.

1907년 10월21일 미국 월스트리트는 구리광산 주식의 대폭락을 신호탄으로 순식간에 패닉(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그해 봄부터 불어닥친 구리 철광 철도 주식에 대한 투기 광풍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의 통화긴축 발언이 겹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연쇄적인 뱅크런으로 일주일 만에 은행과 신탁회사 8개가 문을 닫았다.

증권사 50곳도 파산 직전으로 내몰렸다.

공포가 지배하던 시장에 JP모건의 존 피어폰트 모건 회장이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은행들의 독자적인 행동을 금지하고 파산직전의 영세은행들에게 긴급자금을 수혈하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2500만달러의 구제금융자금을 풀었다.

시장은 겨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금융시장의 뱅크런 위험을 상시적으로 체크하고 위기에 즉각 대처할 수 있는 공적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1913년 FRB 설립으로 이어졌다.

모건 회장은 1907년 당시 '사적인 FRB' 역할을 했던 셈이다.

1998년엔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가 금융시장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결국 FRB가 긴급 구제금융조치를 취하면서 불길이 잡혔다.

'Y2K(컴퓨터 연도인식 오류 문제)'가 극성을 부렸던 1999년에도 비슷한 조치가 취해졌다.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려는 상당수 소비자들은 생필품을 사재기하기 시작했고 은행예금을 인출하려는 수요도 급증했다.

이런 불안 심리를 잠재우기 위해 FRB는 500억달러의 자금을 시중은행에 지원했다.

2001년 9·11테러가 났을 때도 FRB와 유럽중앙은행이 돈 보따리를 풀었다.

중앙은행의 자금 지원은 도덕불감증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처럼 시장에 파국위험이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실시된다. 투자자들의 잘못을 무조건 지원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돈' 대신 '입'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앙은행의 노련한 테크닉이다.

1987년 10월19일 다우지수가 500포인트 이상 급락하는 '블랙먼데이'가 닥치자 그해 FRB의 지휘봉을 잡은 앨런 그린스펀 의장은 강력한 시장 안정 의지를 시장에 던져 불안 심리를 누그러뜨렸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