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심형래 감독의 SF영화 '디워'에서 새롭게 편곡되어 삽입되, 우리곡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린 '아리랑'.

15일 밤 12시 30분 방송될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 "발굴 '아리랑'"에서는 스스로 잊혀진 항일음악가 한유한의 위대한 업적을 발굴, 재조명한다.

한유한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로 알려진 현제명의 '춘향뎐'보다 10년이나 앞서 창작되고 초연된 오페라 '아라랑'의 작곡가로 중국에서 광복활동을 벌이던 이범석 장군 밑에서 선전 대장으로 활동하며 10여 곡의 독립군가를 비롯해 100여 곡이 넘는 곡들을 작곡했다.

그러나 광복 후 고국에 돌아온 뒤에는 요직을 마다하고 고향에서 잊혀진 음악가로 살아가게 되는데….

프로그램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중국 최고 권위의 음악대학인 베이징 중앙음악원의 양마오춘 교수이다.

그는 중국 근대음악가를 정리하던 중 한유한 선생의 폭넓고 뛰어난 작품들에 매료되어 수소문해 선생을 찾았으나 이미 한유한은 작고한 뒤였다.


#중국 근대 음악사에까지 영향을 준 한국 최초의 오페라 ‘아리랑’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는 1950년 서울 오페라단 창립공연으로 초연된 현제명의 ‘춘향뎐’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그보다 10년 전 한유한이 중국 시안에서 오페라 ‘아리랑’을 창작하고 1940년 5월 22일부터 열흘간 초연했음이 기록돼 있으며 그의 제자와 당시 오페라에 참여했던 음악인들은 아직도 한유한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오페라 ‘아리랑’은 본질적으로 항일운동의 일환이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의 선전 대장이었던 선생의 공연수입은 독립군의 군복마련 비용으로 기부돼 독립군의 사기를 높였다.

이뿐이 아니다. 한유한은 중국 시안의 아동보육원에 ‘중국아동극장’을 설립하고 보육원 아이들을 대상으로 가무를 지도, 공연을 개최해 큰 인기를 모았다. 당시 장제쓰, 쑹메이링 등 중국 의회방문단에게까지 선보인 공연은 ‘소산양’, ‘집 없는 아이’, ‘승리무곡’ 등으로 이 또한 중국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귀국한 뒤에도 한유한은 부산에서 ‘자유아동극장’ 겸 ‘색동 야학원’을 열고 전쟁통에 내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2년간 500여 회의 공연을 했다. 12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무료 관람했다.


#이범석 장군의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

5살 때 모친의 등에 업혀 중국으로 간 그는 1928년 상하이 신화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중국 산둥성의 한 여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첫 작품 ‘신혁명군가’를 작사 작곡했다.

이 군가는 중국 전군에 보급됐으며 그 후 철기 이범석 장군을 만나 10여 곡의 독립군가를 비롯해 총 100여곡이 넘는 곡을 작곡했다.


#음표를 숫자로 표시한 ‘숫자보’

그의 악보 중 일부는 특이하게도 음표가 숫자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그가 군인들을 위해 배려한 것으로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숫자보는 18세기 후반에 고안돼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의 악보 기록법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후에 한유한 선생의 숫자보를 한울림합창단에서 해독, 오선지에 옮겨 연주회를 열었다.


한유한은 1948년 광복군으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다.

철기 이범석 장군의 국가 요직 권유에도 불구하고 고향 부산으로 돌아간 그는 더 이상 음악가로 살지 않는다.

활발한 창작 활동을 통해 근대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곡가로 꼽히는 그가 왜 조국에선 잊혀진 작곡가로 살게 된 것일까?

가족들 역시 한유한이 중국 생활 당시 항일운동에 가담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음악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스스로 잊혀진 항일음악가 한유한, 그의 위대한 업적을 발굴, 재조명한다.

한경닷컴 뉴스팀 newsinf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