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대선후보 '버블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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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孝鍾 < 서울대 교수·정치학 >
이번 대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거대 후보자군(群)의 출현이다.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는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캠프는 며칠 뒤면 판가름나겠지만,범여권에서는 수많은 대선 후보주자들이 아옹다옹하고 있다.
언젠가 하나가 될지 둘로 좁혀질지 심지어 그 이상이 될지 모르나,지금은 '컷오프'라는 생소한 절차를 필요로 할 정도로 엄청난 후보자군을 형성하고 있다.
게다가 당적 없이 스스로 '내로라'하며 후보를 선언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75명쯤 된다.
이 많은 대선후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정말로 한국은 인재가 많은 나라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동안 국민들이 고생할 때 어디서 무얼하다가 이제야 나타났단 말인가.
대선에 나서겠다고 뜻을 정한 사람들이라면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특정 분야에서 보통 사람들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일 터이다.
이들을 '영웅'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워도,나라의 '동량(棟梁)'이 될 사람들이라고 불러서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동량이 많고 인재가 많은 것은 분명 나라의 홍복(洪福)이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참여정부 하에서 나왔으니 참여정부가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많고 탈많은 '회전문 인사'를 해 이런 저런 방법으로 경력을 쌓게 하고 총선에서 떨어지면 장관직으로 불러들이는 등의 비상한 방식으로 인재를 길러냈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군계일학(群鷄一鶴)과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모두가 한결같이 '인재'라고 하는데,왜 지지율이 1% 미만부터 시작해 5%를 넘지 못하는가.
이것이 '인재론'이 빛을 잃는 이유이다.
'인재론'이 아니라면 '거품론'이란 말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대선에 나섰는데,무얼 하겠다고 나선 것인가.
"나도 대선후보로 나선 당신만큼 못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혹은 내년 국회의원선거에 대비해 총선용으로 나선 것인가.
아니면 이참에 "이름 석자라도 올려보자"고 나선 것인가. 이런 경우라면 거품론이 제격이다.
부동산에 '버블세븐'이 있다고 하는데,대선후보자군에는 버블 몇이라고 해야 하는가.
버블세븐이 있다고 해서 나라의 품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나,대선후보군에 거품이 끼여 있는 것은 '나라의 품격'과 '정치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 된다.
정치나 민주주의에 품격이 있으려면 사람들 앞에 나서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거창하게 '국민에게 고함'을 외치기 전에 '자신을 돌아봄'을 선언함이 마땅하다.
무엇하나 잘한 게 없는데 태평성대를 만들고 평화번영시대를 열며 못다한 개혁을 하겠다고 말만 하면 되는 것인가.
이것은 참여 포퓰리즘에 불과하다.
아무리 대선이 경주(競走)에 비유되고 있고 경주에는 승리보다 참여가 중요하다지만,그것도 정도 문제다.
지금 대선에 출마한 사람들은 국민을 보기 전에 먼저 거울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
시커먼 굴뚝에서 나온 사람도 거울을 보지 않으면 말짱한 얼굴로 착각하기 쉽다.
대통령은 체면치레나 자아실현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출정식을 하기 전에 엄정한 자기검열과 자기절제가 요구된다.
예선전이라고해서 아무나 나오는 자리던가. 올림픽 경주예선전을 보라.얼마나 뼈를 깎는 아픔을 통해 자격을 쟁취하는가.
설마 한국의 대선이 올림픽 경기만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선이라고 아무나 나온다면 정치의 '천민화'를 부추길 뿐이다.
나라를 위해 밀알이 되겠다는 사람이 최소한 자신의 삶의 궤적 하나 계산할줄 모르고 '낚시하는 심정'으로 대선에 나와서 되겠는가.
낚시를 하다 보면 우연히 대어를 낚겠지 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하거나 "개천에서 용난다"는 데 힘을 얻어 대선에 나서는 것은 곤란하다.
많은 대선후보들을 보고 체증처럼 막힌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디 대선후보들은 자중자애해야 한다.
지금은 춘추전국시대도 아니고 백가쟁명의 시대도,백화제방의 시대도 아니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시대인데,왜 이리 대선후보자들이 허기진 사람들처럼 덤비는가.
그들을 보기가 과히 아름답지가 않다.
이번 대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거대 후보자군(群)의 출현이다.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는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캠프는 며칠 뒤면 판가름나겠지만,범여권에서는 수많은 대선 후보주자들이 아옹다옹하고 있다.
언젠가 하나가 될지 둘로 좁혀질지 심지어 그 이상이 될지 모르나,지금은 '컷오프'라는 생소한 절차를 필요로 할 정도로 엄청난 후보자군을 형성하고 있다.
게다가 당적 없이 스스로 '내로라'하며 후보를 선언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75명쯤 된다.
이 많은 대선후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정말로 한국은 인재가 많은 나라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동안 국민들이 고생할 때 어디서 무얼하다가 이제야 나타났단 말인가.
대선에 나서겠다고 뜻을 정한 사람들이라면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특정 분야에서 보통 사람들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일 터이다.
이들을 '영웅'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워도,나라의 '동량(棟梁)'이 될 사람들이라고 불러서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동량이 많고 인재가 많은 것은 분명 나라의 홍복(洪福)이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참여정부 하에서 나왔으니 참여정부가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많고 탈많은 '회전문 인사'를 해 이런 저런 방법으로 경력을 쌓게 하고 총선에서 떨어지면 장관직으로 불러들이는 등의 비상한 방식으로 인재를 길러냈다.
그렇다면 이 가운데 군계일학(群鷄一鶴)과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모두가 한결같이 '인재'라고 하는데,왜 지지율이 1% 미만부터 시작해 5%를 넘지 못하는가.
이것이 '인재론'이 빛을 잃는 이유이다.
'인재론'이 아니라면 '거품론'이란 말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대선에 나섰는데,무얼 하겠다고 나선 것인가.
"나도 대선후보로 나선 당신만큼 못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혹은 내년 국회의원선거에 대비해 총선용으로 나선 것인가.
아니면 이참에 "이름 석자라도 올려보자"고 나선 것인가. 이런 경우라면 거품론이 제격이다.
부동산에 '버블세븐'이 있다고 하는데,대선후보자군에는 버블 몇이라고 해야 하는가.
버블세븐이 있다고 해서 나라의 품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나,대선후보군에 거품이 끼여 있는 것은 '나라의 품격'과 '정치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 된다.
정치나 민주주의에 품격이 있으려면 사람들 앞에 나서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거창하게 '국민에게 고함'을 외치기 전에 '자신을 돌아봄'을 선언함이 마땅하다.
무엇하나 잘한 게 없는데 태평성대를 만들고 평화번영시대를 열며 못다한 개혁을 하겠다고 말만 하면 되는 것인가.
이것은 참여 포퓰리즘에 불과하다.
아무리 대선이 경주(競走)에 비유되고 있고 경주에는 승리보다 참여가 중요하다지만,그것도 정도 문제다.
지금 대선에 출마한 사람들은 국민을 보기 전에 먼저 거울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
시커먼 굴뚝에서 나온 사람도 거울을 보지 않으면 말짱한 얼굴로 착각하기 쉽다.
대통령은 체면치레나 자아실현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출정식을 하기 전에 엄정한 자기검열과 자기절제가 요구된다.
예선전이라고해서 아무나 나오는 자리던가. 올림픽 경주예선전을 보라.얼마나 뼈를 깎는 아픔을 통해 자격을 쟁취하는가.
설마 한국의 대선이 올림픽 경기만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선이라고 아무나 나온다면 정치의 '천민화'를 부추길 뿐이다.
나라를 위해 밀알이 되겠다는 사람이 최소한 자신의 삶의 궤적 하나 계산할줄 모르고 '낚시하는 심정'으로 대선에 나와서 되겠는가.
낚시를 하다 보면 우연히 대어를 낚겠지 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하거나 "개천에서 용난다"는 데 힘을 얻어 대선에 나서는 것은 곤란하다.
많은 대선후보들을 보고 체증처럼 막힌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디 대선후보들은 자중자애해야 한다.
지금은 춘추전국시대도 아니고 백가쟁명의 시대도,백화제방의 시대도 아니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시대인데,왜 이리 대선후보자들이 허기진 사람들처럼 덤비는가.
그들을 보기가 과히 아름답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