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로 분단됐던 독일이 통일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아홉 차례의 양국 정상 간 회담이 있었다.

동방정책의 브란트 서독 총리가 1970년 3월 동독 에어푸르트에서 슈토프 총리를 처음 대좌한 이후 양국 정상은 동·서독을 오가며 여섯 차례 공식회담을 했고,나머지 세 번은 구(舊) 소련 최고권력자였던 브레즈네프와 안드로포프,체르넨코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스크바에서의 비공식 만남이었다.

이 중 가장 극적이었던 회담은 통일 주역인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에리히 호네커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이 1987년 9월에 가진 4차 공식회담으로 손꼽힌다.

동독 정상이 서독의 수도 본에 처음 입성한 이 회담을 콜 총리는 매우 꺼렸다고 한다.

콜은 후일 "서독 하늘 아래 동독의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독재자 호네커와 의장대를 사열해야 하는 게 몹시 괴로웠다"고 회고록에 썼다.

게다가 호네커는 1961년 철조망과 벽돌로 쌓은 베를린장벽의 건설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당시 호네커로서는 소련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으로 본격적인 데탕트시대가 열리면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고립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서독 방문이 무엇보다 절실했었다.

콜 총리 특유의 뱃심 있는 승부수는 여기서 던져졌다.

당시 서독이 요구한 핵심 쟁점은 동·서독 정상의 연설을 양쪽 국민 모두에게 여과없이 생중계해 달라는 것이었다.

동독은 '차라리 회담을 포기하겠다'고 버텼지만 서독은 그게 안 되면 어떤 의제를 다루든 아무 의미가 없다고 으름장을 놨다.

결국 호네커가 굴복했다.

콜은 동독 주민들을 상대로 직접 연설을 통해 "모든 독일민족은 자유로운 자결권(自決權)으로 독일통일과 자유를 이룩해야 한다"고 규정한 '기본법' 전문(前文)의 원칙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강한 어조로 전달했다.

베를린장벽이 일순간에 무너진 것은 그로부터 불과 3년 후인 1990년 10월이었다.

오는 28일부터 남북정상회담이 7년 만에 열린다.

비록 냉전(冷戰)시대는 끝났지만 전쟁의 상처를 지닌 남북관계이고 보면 독일의 경험이 교훈으로서 한계가 있는 건 분명하다.

더구나 핵을 앞세운 북을 상대로 신뢰증진과 협력확대를 통한 경제공동체 건설,평화체제 정착,나아가 통일을 달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를 넘고,또 정상회담이 거듭되어야 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것은 서독이 막강한 경제력으로 동독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달라는 대로 주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교역 통신 교통 우편 금융 상호방문 등의 수많은 개방협정을 이끌어내는 '교환의 원칙'을 반드시 고수했다.

수십억마르크 차관의 대가로 국경배치 무기의 자동발사장치 철거,동독 주민의 서독이주,핵시설 안전조치 등을 얻어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반도 평화의 선결조건인 핵폐기 문제의 정상회담 논의조차 불투명한데도 우리 장병들이 목숨으로 지켜낸 북방한계선(NLL)을 두고 정부의 책임 있는 당국자가 "영토개념이 아니다"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해마다 실시해온 한미합동군사훈련도 일부 연기하는 등 스스로 무장해제부터 하기에 바쁘다.

회담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고,만나고 양보만 한다고 해서 신뢰가 증진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미리 알아서 쥐어준 꽃놀이 패를 들고 북의 김정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추창근 논설위원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