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화려한 휴가'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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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 시인.명지대 교수 >
상암CGV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봤다.
며칠 전 이랜드 비정규직 노조원들의 장기 농성이 강제해산당했던 곳이었다.
두 명의 전경이 영화관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영화 때문이었을까,이랜드 파업투쟁 때문이었을까.
영화가 시작되면서 나는 놀랐다.
오월 광주가 '전설의 고향'을 보던,고인이 된 이주일이라는 코미디언이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라며 바지춤을 움켜쥐던,내가 갈래머리 여고생이던,그때 그 시절의 일이었다는 게 새삼스러워서였다.
6교시 체육을 위해 옷을 갈아입던 쉬는 사이였다.
같은 캠퍼스를 쓰던 대학생 오빠들이 시위를 하다 여고 건물로 뛰어 들어왔다.
건물 안에 최루탄을 쏘면서 전경들이 쫓아 들어왔다.
쫓고 쫓기는,맞고 때리는,저항하고 붙잡혀가는 몸부림과 비명과 최루가스로 교실과 복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체육복 상의에 한쪽 팔을 끼운 채 캑캑거리며 악악거리며 휩쓸려 건물을 나왔다.
서울에 살던 내게 오월 광주는 그렇게 왔다.
시를 쓰겠다며 신촌 근처를 배회하던 대학시절,최루탄과 지랄탄은 우리의 일상이었고 모든 모임은 집회의 성격을 띠곤 했었다.
교내 곳곳에 오월 광주의 사진이 걸렸고 더 은밀하게는 오월 광주의 영상자료가 돌았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가슴에서,입에서,펜에서 오월은 뜨거운 진행형이었다.
오월 광주는 그렇게 이십대를 관통하는 화인(火印)이었다.
"내가 처음 바다를 만난 것은 오월이었고/아이들이 해당화와 함께 뒹굴던/칼레의 해변,바다가 함성을 지르고 일어나/내 가슴속에서 자라고 있었다/칼레의 오월,내 가슴속에 자라던 바다/ 나는 그 오월 매일밤 바다를 만나러 갔다"('칼레의 바다' 중에서).1988년,나의 등단 작품 한가운데 오월 광주가 있었던가.
영화 속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개시되면서 끔찍스런 폭력의 장면들마다 소리를 지르며 기겁하는 내 스스로에 대해 나는 또 한번 놀랐다.
27년 전의 현실이,지금,내게,공포영화 아니 '전설의 고향'처럼 다가오다니!엔딩 자막과 함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올 때 나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오래 잊고 있었던 어떤 뜨거움과 잊어서는 안 될 그 무언가를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는 뭉클함 때문이었다.
얼마 전 나는 파업노조원의 가족이었다.
이 실업천만의 시대에 파업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실직의 지름길이라고 만류했다.
이제 파업은 가사노동에 지친 엄마나 학원에 지친 아이들이 투정처럼 하는 것이고,생태계 혼란에 빠진 아카시아나 꿀벌들이 대책 없이 하는 거라고 반대했다.
거두절미하고 21세기는 더 이상 파업의 시대가 아니라고,파업이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였고 파업이 세계를 변화시키던 시대는 갔다고 말했다.
귀족노동자들이 벌이는 노사 간의 힘겨루기에 불과한 것이고,노동의 신성함이니 노조의 정의 따위는 낡은 책 속에나 있는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제 파업은 정규직 귀족노동자와 비정규직 천민노동자 간의 밥그릇 싸움이 되었다고 회의했다.
그날 밤,나는 썼다.
무관한 일이라고 묵인하고,모르는 일이라고 외면하고,소용없는 일이라고 은폐하고,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동조하고,자기도 모르게 그런 스스로를 오히려 정당화시키는 나 혹은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썼다.
"세기의 상현달이 반괄호처럼 먹구름에 꽂혀 있었던/ 당신의 파업이 늦은 밤이었다"('당신의 파업' 중에서)라고.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던 선후배와 동료들은 청와대 국회 법원 언론사 대학으로 갔고,대치동 개포동 도곡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그 노래를 함께 불렀던 그 많았던 우리는,나는,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그때 그 '님'은 어디 가고 님만 님이 되었을까.
상암CGV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봤다.
며칠 전 이랜드 비정규직 노조원들의 장기 농성이 강제해산당했던 곳이었다.
두 명의 전경이 영화관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영화 때문이었을까,이랜드 파업투쟁 때문이었을까.
영화가 시작되면서 나는 놀랐다.
오월 광주가 '전설의 고향'을 보던,고인이 된 이주일이라는 코미디언이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라며 바지춤을 움켜쥐던,내가 갈래머리 여고생이던,그때 그 시절의 일이었다는 게 새삼스러워서였다.
6교시 체육을 위해 옷을 갈아입던 쉬는 사이였다.
같은 캠퍼스를 쓰던 대학생 오빠들이 시위를 하다 여고 건물로 뛰어 들어왔다.
건물 안에 최루탄을 쏘면서 전경들이 쫓아 들어왔다.
쫓고 쫓기는,맞고 때리는,저항하고 붙잡혀가는 몸부림과 비명과 최루가스로 교실과 복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체육복 상의에 한쪽 팔을 끼운 채 캑캑거리며 악악거리며 휩쓸려 건물을 나왔다.
서울에 살던 내게 오월 광주는 그렇게 왔다.
시를 쓰겠다며 신촌 근처를 배회하던 대학시절,최루탄과 지랄탄은 우리의 일상이었고 모든 모임은 집회의 성격을 띠곤 했었다.
교내 곳곳에 오월 광주의 사진이 걸렸고 더 은밀하게는 오월 광주의 영상자료가 돌았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가슴에서,입에서,펜에서 오월은 뜨거운 진행형이었다.
오월 광주는 그렇게 이십대를 관통하는 화인(火印)이었다.
"내가 처음 바다를 만난 것은 오월이었고/아이들이 해당화와 함께 뒹굴던/칼레의 해변,바다가 함성을 지르고 일어나/내 가슴속에서 자라고 있었다/칼레의 오월,내 가슴속에 자라던 바다/ 나는 그 오월 매일밤 바다를 만나러 갔다"('칼레의 바다' 중에서).1988년,나의 등단 작품 한가운데 오월 광주가 있었던가.
영화 속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개시되면서 끔찍스런 폭력의 장면들마다 소리를 지르며 기겁하는 내 스스로에 대해 나는 또 한번 놀랐다.
27년 전의 현실이,지금,내게,공포영화 아니 '전설의 고향'처럼 다가오다니!엔딩 자막과 함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올 때 나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오래 잊고 있었던 어떤 뜨거움과 잊어서는 안 될 그 무언가를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는 뭉클함 때문이었다.
얼마 전 나는 파업노조원의 가족이었다.
이 실업천만의 시대에 파업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실직의 지름길이라고 만류했다.
이제 파업은 가사노동에 지친 엄마나 학원에 지친 아이들이 투정처럼 하는 것이고,생태계 혼란에 빠진 아카시아나 꿀벌들이 대책 없이 하는 거라고 반대했다.
거두절미하고 21세기는 더 이상 파업의 시대가 아니라고,파업이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였고 파업이 세계를 변화시키던 시대는 갔다고 말했다.
귀족노동자들이 벌이는 노사 간의 힘겨루기에 불과한 것이고,노동의 신성함이니 노조의 정의 따위는 낡은 책 속에나 있는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제 파업은 정규직 귀족노동자와 비정규직 천민노동자 간의 밥그릇 싸움이 되었다고 회의했다.
그날 밤,나는 썼다.
무관한 일이라고 묵인하고,모르는 일이라고 외면하고,소용없는 일이라고 은폐하고,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동조하고,자기도 모르게 그런 스스로를 오히려 정당화시키는 나 혹은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썼다.
"세기의 상현달이 반괄호처럼 먹구름에 꽂혀 있었던/ 당신의 파업이 늦은 밤이었다"('당신의 파업' 중에서)라고.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던 선후배와 동료들은 청와대 국회 법원 언론사 대학으로 갔고,대치동 개포동 도곡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그 노래를 함께 불렀던 그 많았던 우리는,나는,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그때 그 '님'은 어디 가고 님만 님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