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과 임권택이라는 두 거장이 만난 '축제'. 소설과 영화가 함께 만들어진 '축제'는 대놓고 장례를 축제라고 부른다. 장례식을 다룬 영화 '학생부군신위'에서는 아예 조그마한 엄숙함도 없다. 우리네 삶에서 장례는 분명 또다른 면에서 '축제'다. '죽음'이라는 가장 실존적인 사건 앞에서 실은 '亡者'의 마지막 의식인 장례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을 잊기 위한 방편이든 죽음의 두려움을 잊기 위한 노력이든 간에 늘 시끌하다. 이 '시끌함'을 위해 경사는 찾지 않아도 애사는 꼭 찾는 게 또 우리네 인정이다. 그러다보니 '장례'는 이별의식이기도 하지만 또하나의 '만남'의 장소가 된다. 타향의 가족, 친지는 물론이고 잊고 지냈던 친구, 지인들이 한무더기가 된다. 깊은 만남을 위해 술과 '기계(?)'가 동원되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만남은 유족들에게 또다른 수고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요즘 유행하는 부의금만 덜렁 놓고 가는 빈소는 간혹 '인정상' 빈축을 사기도 한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미망인인 변중석 여사의 빈소는 근래에 보기드문 만남의 자리다. 현대상선과 현대건설 경영권 문제를 놓고 갈등을 벌여온 아들 정몽준 의원과 며느리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좋든 싫든 발인인 21일까지는 자리를 함께 해야 한다. 둘 만이 아니다. 만도 인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인수 등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던 현대차그룹, 한라그룹, KCC, 현대그룹 등이 변중석 여사의 장례를 계기로 한자리에 모였다. 집안에 '큰 어른'인 변중석 여사의 타계는 이제 현대가의 가장 어른이 되버린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역할에 더 무게를 실을 전망이다. 사실상 맏이 구심점이 되는 것 역시 아직은 우리네 문화다. 현대가의 결속은 그 덩치만큼이나 우리 경제와도 상관관계가 깊다. 만남은 비단 현대가 형제들만의 얘기는 아니다. 17일부터 반나절도 안돼 서울 아산병원 빈소를 찾은 조문객은 모두 5백여명. 18일에도 조문객의 행렬은 끝이 없다. 때는 달리했지만 이명박, 박근혜 두 대선 예비후보가 찾았고 한덕수 총리, 권오규 부총리,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 및 부총리,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도 빈소에 왔다. 재계에서는 조석래 전경련 회장과, 이희범 무역협회장, 이수영 경총 회장, 그리고 4대그룹 중에는 최태원 SK 회장이 제일 먼저 상주를 만났다. 거기에 FIFA 부회장 등 축구계 인사와 홍명보 코치 등 축구계 인사도 왔다. 조금이라도 만남은 분명 이해와 화해의 장이 될 것이다. 현대차그룹 사장단은 아예 빈소에 자리를 잡았다. 현대차의 김동진 부회장을 비롯해 최재국 사장, 기아차의 조남홍 사장, 현대모비스의 정석수 사장 등 대부분의 현대차그룹 사장단이 이틀째 자리를 지켰다. 사장이 그럴진대 부사장 이하 임원들은 말할 것도 없다. 평소에 쉽게 만나기 힘든 현대차그룹 임원들은 검은 상의를 걸어놓고 빈소 밖에 늘어선 방들을 죄다 메웠다. 만남은 여기서도 깊어진다. '확대간부회의'보다 더 많은 현대차그룹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여 최근 자동차 시장을 얘기하고 회사를 얘기하고 시시콜콜해서 더 애정이 가는 사는 얘기들을 나눈다. 거기에 거래처 사람이라도 끼면 이내 명함이 돌고 술잔이 간다. 색다른 만남도 눈에 띈다. 검은 상복을 꺼내 입은 중년의 사장단 부인들이다. 현대차그룹 사장단의 조문은 '동부인'이어서 조문이 끝난뒤 남편이 2층 빈소에 자리를 잡는 동안 십여명의 부인들이 장례식장 1층 로비에서 둘러 앉았다. 사장들이 빈소를 지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들의 얘기도 넓어지고 깊어지는 표정이다. 어떤 얘기들을 할까 궁금해진다. 와중에 가장 분주한 만남은 역시 기자들이다. 각계 인사들이 줄을 이어 조문하기 때문에 빈소 입구에 아예 진을 쳤다. 뉴스가 될만한 인사는 엘리베이터에서 1층 입구까지 쭉 따라붙는다. 고인과의 관계. 앞으로의 사업전망, 평소 궁금한 질문들이 쏟아진다. 간혹 '꺼리'가 되는 대답은 지면에 오르기도 한다. 故 변중석 여사는 평소 검소하고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오히려 유명했다. 말이 없이 17년동안이나 입원했다 별세했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지막으로 많은 '만남'들을 남겼다. 만남이 빈소에 디딜틈없이 들어선 조화처럼 어깨를 부대끼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기를 기대해본다. 박성태기자 stpark@wowtv.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