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Report - 남미는 지금] (3)두 얼굴의 경제‥극심한 빈부격차 '남미病'에 투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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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 한복판의 오벨리스코(Obelisco) 광장.이달 초 살갗을 파고 드는 매서운 추위에도 코트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추레한 옷차림의 시민 수십명이 피켓 시위를 벌였다.
빈민단체 회원인 이들은 매주 한두 차례씩 '생활지원금을 늘려달라''일자리를 내놔라' 등의 요구를 내걸고 농성을 벌인다.
아르헨티나 상공회의소의 로드리고 페레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절대 분배를 강조한 페로니즘(Peronism)의 망령이 아직도 이 나라 대중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며 "극심한 빈부격차가 파생시킨 남미병(病)이 치유되지 않는 한 아르헨티나건 브라질이건 정치·경제의 온전한 안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2 산티아고 교민 김모씨는 몇 년 전 칠레로 이민을 와 생업으로 해 온 봉제의류 사업을 최근 접었다.
법인세 기본세율만 17%에다 이익을 배당받을 때 부과되는 35%의 추가세율,19%에 달하는 부가가치세 등 복잡하고 높은 '세금 폭탄'때문이 아니었다.
재고 조사를 할 때마다 매출로 나간 것 이상으로 물건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어느 날 퇴근길의 현지 종업원들을 몸수색했다.
그랬더니 20여명의 직원들이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퇴근 가방 속에 숨긴 의류 두어벌씩을 적발했다.
선배 교민 사업가들이 "빈곤의 대물림에 빠진 칠레 저소득층을 고용해 사업하려면 다 감안해야 하는 것"이라고 위로했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다른 사업을 찾기로 했다.
#3 상파울루 북서부의 아브론 데 모라이스가(街)는 시민들 사이에 '도난품의 거리'로 불린다.
길 양쪽에 핸들,문짝,좌석 등 온갖 자동차 부품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대부분이 훔친 자동차에서 뜯어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1분30초에 한 대.브라질에서 발생하는 자동차 도난사고의 평균 빈도다.
도난당한 자동차는 한 시간 안에 깨끗이 해체돼 각종 부품들로 정리된 뒤 모라이스 거리로 흘러나온다.
◆남미발(發) 포퓰리즘의 근원,극단적인 빈부격차
브라질은 지난해 기준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3.5%가 보안산업에서 발생할 정도로 강·절도 사건이 극심한 나라다.
전체 가구의 35%가 월 평균 소득 424헤알(약 21만원) 이하인 'D클래스'와 207헤알(약 10만3000원)에 못 미치는 'E클래스'에 이를 정도로 절대 빈곤층이 많은 결과다.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등 대도시가 온갖 범죄의 온상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건 브라질의 수치다.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운 빈민들이 먹고 살기 위한 생업으로 강도질에 나서는 걸 누가 막겠는가." 브라질 최고 명문 경영대학원인 FGV스쿨 호제리우 모리 교수의 탄식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소수 상류층과 하루살이를 걱정해야 하는 다수의 극빈층으로 양극화된 사회.남미 국가들의 공통 현실이다.
브라질은 상위 1%의 소득이 하위 50%와 맞먹는다.
전 국민의 95%가 백인으로 '남미의 유럽'을 자처하는 아르헨티나에서도 월 수입 500페소(약 15만원)에 못 미치는 절대 빈곤층이 전 인구의 12%,900페소(약 28만원) 이하인 빈곤층은 30%를 넘나든다(페레스 수석 이코노미스트).칠레도 상위 20%가 총수입의 57.3%,하위 20%는 총수입의 3.7%를 나눠갖고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빈부격차에 시달리고 있다.
세계 좌파 종교인과 지식인,정치인들 사이에 빠르게 번식돼 나간 해방신학이나 분배 우선을 내세운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이 다 남미에서 생성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새 시장의 원동력,'볼사 파밀리아'
그러나 최근 남미3국의 이런 '만성 병'이 조금이나마 치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원유와 곡물 철광석 구리 등 풍부하게 부존하고 있는 자원의 국제시세가 급등하면서 국가 재정이 탄탄해지자 빈곤층 생활개선과 일자리 창출,직접 보조 등 각종 지원사업을 늘리고 있어서다.
이들 나라의 좌파 정권은 최대 지지기반인 저소득층을 겨냥한 빈곤 해소 정책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로 불리는 저소득층 생계지원 정책을 2003년 집권 초부터 추진,작년 말까지 월 소득 100헤알(약 5만원)에 못 미치는 1110만가구에 83억헤알(약 4조1500억원)을 지원했다.
다른 남미국가들도 '볼사 파밀리아'를 본뜬 정책을 앞다퉈 시행하고 있다.
그 결과로 빈곤층의 소득이 향상되면서 예전에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소비수요가 일어나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올 상반기 중 '빈곤 지대'로 불리는 동북부와 북부 아마존 지역의 소비 증가율이 전국 평균을 두 배 가까이 웃돌았다.
아르헨티나도 2003년 이후 연평균 9%를 넘나드는 고성장 덕분에 4년 전 16%를 넘었던 실업률이 8%대로 하락했다.
16년 만의 최저치로 내려앉으면서 저소득층 소비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칠레 역시 1980년대 초 50%를 웃돌았던 빈곤계층이 2000년대 들어 20%대로 내려앉으면서 의류 잡화 등 소비재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다.
◆ '빈곤층 마케팅' 성공한 네슬레
저소득층 구매력이 커지자 미국 유럽 일본의 거대 소비재 기업들이 발빠르게 '빈곤층 마케팅' 경쟁에 들어갔다.
브라질 유력 일간지인 폴랴 데 상파울루는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미국 생활용품 회사인 존슨앤드존슨을 소개하는 기사를 최근 게재했다.
이 회사는 월 소득이 1100헤알(약 55만원)을 밑도는 '클래스 C'이하의 저소득층을 겨냥,2년 전 소프트로션 판매가격을 30% 내리는 '박리다매' 전략으로 선회한 이후 매출이 4배 이상 늘어나는 수확을 챙겼다.
스위스 유니레버와 네슬레는 아예 빈곤층 집단 주거지역인 브라질 북동부에 공장을 세우고 주민들 구매력에 맞는 포장 및 가격정책을 채택,최근 5년간 매출이 각각 5배씩 늘어나는 기염을 토했다.
네슬레는 저소득층에 특화해 가격을 낮추고 영양을 높인 분유를 내놔 돌풍을 일으켰다.
비스킷도 주 고객층의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200g으로 돼있던 포장단위를 140g으로 줄인 대신 가격을 더 낮춰 빈민가 어린이들을 사로잡았다.
브라질에서만 1억명,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국가들을 다 합치면 2억명에 육박하는 '빈곤층 시장'은 식음료·생활용품 등 단순 소비재를 넘어 가전제품 등 내구 소비재 기업들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다는 브라질의 다양한 소비층을 겨냥해 세분화된 모델의 오토바이를 내놓으면서 시장점유율을 80%로 끌어올렸다.
중국의 에어컨 회사인 Gree는 아마존 유역 마나우스에 조립공장을 짓고 저소득층을 겨냥한 저가 모델로 시장 점유율 10%를 바라보고 있다.
남미 국가들이 고질적 빈부격차라는 '남미 병(病)'과의 '전쟁'에 나서면서 조금씩 넓혀지고 있는 저소득층 시장을 선점하려는 글로벌 기업들 간 전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상파울루·부에노스아이레스·산티아고=글·사진 이학영 생활경제부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