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헬싱키 한복판의 식민군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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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星來 <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과학사 >
헬싱키의 한복판에는 알렉산더 2세의 동상이 서 있었다.
보름 전 처음으로 핀란드를 구경 간 내 눈에 헬싱키 중심광장 가운데 서있는 러시아 짜르(황제)의 동상은 마치 서울 한복판에서 이등박문의 동상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핀란드는 러시아의 식민지였고,당연히 그들의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황제의 동상이 그 나라 상원,정부청사 및 헬싱키대학 등이 있는 수도 중심 광장에 번듯하게 세워져 있는 것이다.
세계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얀 시벨리우스(1865~1957)의 조국 찬가 '핀란디아'가 작곡된 것은 1899년,그 선동성을 염려한 러시아가 한때 연주를 금지했다.
청년기에 내 자신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길러준 것은 바로 이 노래였다.
체코의 스메타나(1824~1884)가 지은 '나의 조국' 가운데의 '몰다우'와 함께….그런 기억을 아직 간직한 나의 눈에 헬싱키의 알렉산더 동상은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괴물이었다.
물론 알렉산더 2세(1818~1881)는 러시아 최대의 개명(開明) 군주라 여겨진다.
1855년 러시아 황제 자리에 오른 그는 1861년에는 농노를 해방했고,군을 개혁했다.
지방자치를 시작해 세금징수권 일부를 지방에 넘겼으며,사형제도 폐지할 판이었다.
또 암살당하기 직전 그는 국회 소집계획을 공포할 문안을 완성해 둔 상태였다.
정권을 대폭 국민의 손에 넘길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대대적인 개혁도 노동자의 불만과 혁명가들의 극단적인 요구를 잠재울 수 없었다.
특히 당시의 급진 혁명사상가들에게는 알렉산더 2세란 너무나 늑장을 부리는 보수 골통에 지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암살 음모를 피했던 그는 1881년 3월 결국 혁명 지하단체 청년들의 폭탄에 쓰러졌다.
바로 그런 알렉산더 2세가 핀란드 사람들에게는 '은인'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오랜 기간 스웨덴 식민지였던 핀란드는 1809년 러시아로 종주국을 바꿨고,1812년 헬싱키는 새 수도가 됐다.
1863년 러시아 황제이며 핀란드 대공(大公)이던 그는 핀란드 의회를 다시 소집했고,고유의 화폐를 인정했으며,특히 핀란드어를 공인해 주었다.
핀란드의 자치를 더욱 북돋워주는 조치들이 이어졌던 셈이다.
하지만 그가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알렉산더 3세)과 손자(니콜라스 2세) 대에 러시아는 핀란드를 탄압했다.
물론 러시아에서도 같은 탄압이 시작됐다.
핀란드어를 금지하고 러시아어를 강요했으며 자치 역시 취소됐다.
바로 그런 시기에 핀란드 사람들은 알렉산더의 동상을 세우며 그 시대로 돌아가 달라고 러시아 정부에 탄원했다.
시벨리우스가 조국의 찬가를 작곡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알렉산더 2세의 동상은 이런 가운데 핀란드인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그 중심광장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하기는 헬싱키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관광명소로는 항만 입구 섬에 있는 군사요새도 있다.
원래 스웨덴이 러시아 침공을 막고자 만든 이 요새는 러시아 차지가 되자 러시아 군사요새로 탈바꿈했다.
수많은 땅굴과 참호,성당과 성채,그리고 빙 둘러 설치한 대포 등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모습이다.
핀란드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만들었을 뿐인 이 식민지 잔재를 핀란드 사람들은 1918년 인수해 '핀란드 성(城)'(Suomenlinna·수오멘린나)이란 새 이름을 짓고,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아 관광 명소로 개발해 놓았다.
식민지 경험은 나라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헬싱키의 알렉산더 동상과 '핀란드 성'을 보면서,한국 같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서울에 적국 지도자의 동상을 세웠다면,그것은 해방과 함께 당장 때려부쉈을 것이 분명하다.
4·19에 때려 부순 이승만의 동상만 보더라도 그런 짐작이 간다.
그런 동상을 세운 사람들은 반민족주의자로 매도당하고,그 세세한 내용을 조사해 '악당(惡黨)'명부에 오르게 됐을 것 같다.
우리도 핀란드의 경우를 참고할 만하지 않을까.
헬싱키의 한복판에는 알렉산더 2세의 동상이 서 있었다.
보름 전 처음으로 핀란드를 구경 간 내 눈에 헬싱키 중심광장 가운데 서있는 러시아 짜르(황제)의 동상은 마치 서울 한복판에서 이등박문의 동상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핀란드는 러시아의 식민지였고,당연히 그들의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황제의 동상이 그 나라 상원,정부청사 및 헬싱키대학 등이 있는 수도 중심 광장에 번듯하게 세워져 있는 것이다.
세계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얀 시벨리우스(1865~1957)의 조국 찬가 '핀란디아'가 작곡된 것은 1899년,그 선동성을 염려한 러시아가 한때 연주를 금지했다.
청년기에 내 자신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길러준 것은 바로 이 노래였다.
체코의 스메타나(1824~1884)가 지은 '나의 조국' 가운데의 '몰다우'와 함께….그런 기억을 아직 간직한 나의 눈에 헬싱키의 알렉산더 동상은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괴물이었다.
물론 알렉산더 2세(1818~1881)는 러시아 최대의 개명(開明) 군주라 여겨진다.
1855년 러시아 황제 자리에 오른 그는 1861년에는 농노를 해방했고,군을 개혁했다.
지방자치를 시작해 세금징수권 일부를 지방에 넘겼으며,사형제도 폐지할 판이었다.
또 암살당하기 직전 그는 국회 소집계획을 공포할 문안을 완성해 둔 상태였다.
정권을 대폭 국민의 손에 넘길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대대적인 개혁도 노동자의 불만과 혁명가들의 극단적인 요구를 잠재울 수 없었다.
특히 당시의 급진 혁명사상가들에게는 알렉산더 2세란 너무나 늑장을 부리는 보수 골통에 지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암살 음모를 피했던 그는 1881년 3월 결국 혁명 지하단체 청년들의 폭탄에 쓰러졌다.
바로 그런 알렉산더 2세가 핀란드 사람들에게는 '은인'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오랜 기간 스웨덴 식민지였던 핀란드는 1809년 러시아로 종주국을 바꿨고,1812년 헬싱키는 새 수도가 됐다.
1863년 러시아 황제이며 핀란드 대공(大公)이던 그는 핀란드 의회를 다시 소집했고,고유의 화폐를 인정했으며,특히 핀란드어를 공인해 주었다.
핀란드의 자치를 더욱 북돋워주는 조치들이 이어졌던 셈이다.
하지만 그가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알렉산더 3세)과 손자(니콜라스 2세) 대에 러시아는 핀란드를 탄압했다.
물론 러시아에서도 같은 탄압이 시작됐다.
핀란드어를 금지하고 러시아어를 강요했으며 자치 역시 취소됐다.
바로 그런 시기에 핀란드 사람들은 알렉산더의 동상을 세우며 그 시대로 돌아가 달라고 러시아 정부에 탄원했다.
시벨리우스가 조국의 찬가를 작곡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알렉산더 2세의 동상은 이런 가운데 핀란드인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그 중심광장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하기는 헬싱키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다는 관광명소로는 항만 입구 섬에 있는 군사요새도 있다.
원래 스웨덴이 러시아 침공을 막고자 만든 이 요새는 러시아 차지가 되자 러시아 군사요새로 탈바꿈했다.
수많은 땅굴과 참호,성당과 성채,그리고 빙 둘러 설치한 대포 등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모습이다.
핀란드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만들었을 뿐인 이 식민지 잔재를 핀란드 사람들은 1918년 인수해 '핀란드 성(城)'(Suomenlinna·수오멘린나)이란 새 이름을 짓고,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아 관광 명소로 개발해 놓았다.
식민지 경험은 나라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헬싱키의 알렉산더 동상과 '핀란드 성'을 보면서,한국 같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서울에 적국 지도자의 동상을 세웠다면,그것은 해방과 함께 당장 때려부쉈을 것이 분명하다.
4·19에 때려 부순 이승만의 동상만 보더라도 그런 짐작이 간다.
그런 동상을 세운 사람들은 반민족주의자로 매도당하고,그 세세한 내용을 조사해 '악당(惡黨)'명부에 오르게 됐을 것 같다.
우리도 핀란드의 경우를 참고할 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