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 美 貞 < 이룸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변리사 ahn@eruum.com >

최근 각 정당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페이스메이커(pacemaker)'.전반적인 과정이 다소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치열한 경선에 참가하고 있는 후보들이 스스로를 페이스메이커로 자처하며 자신의 목표가 우승이 아님을 내세우는 것이 다소 아이로니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나에게 페이스메이커란 단어는 오랫동안 고마움과 감동의 의미로 각인된 말이다.

20여년 전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가게 되었을 때 주위 분들은 영화 '대부'의 영향 때문인지 마피아를 떠올리며 걱정하셨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나는 흑인이 유난히 많았던 시카고 다운타운에 있었음에도 은퇴한 마피아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이탈리아 타운에서,믿음직한 이탈리아 집주인 아저씨의 보살핌 아래 오히려 안전한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집주인 아저씨가 심장에 이상이 생겨 중환자실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셨는데,다행히도 비정상적인 심장의 박동을 정상으로 유지시켜주는 페이스메이커란 의료기기 덕분에 건강한 생활을 하실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내게 페이스메이커는 친절하고 마음씨 좋은 집주인 아저씨를 지켜주는 고마운 단어로 깊이 각인되었다.

또 하나,감동으로 다가온 페이스메이커와의 조우는 미국의 어느 식당에서 우연히 보게 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였다.

황영조 선수의 우승 장면을 함께 보던 식당 손님들은 단지 내가 한국인이란 이유로 초면인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넸고,유학 스트레스를 한번에 날려 보내는 쾌거로 마라톤은 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 또다시 페이스메이커란 단어를 접하게 되었고,한 사람의 마라톤 스타를 위해 본인의 목표는 접어두고 묵묵히 같이 달려주며 우승자의 최후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 역시 가슴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최근의 경선뿐 아니라 로스쿨제도 운영을 위한 각 대학과 변호사협회의 대립,매년 반복되는 노사의 대립,다양한 분야에서 어김없이 충돌하는 각 이익집단 간의 대립 등 주변에서 과열되고 비정상적인 현장을 찾는 것은 이제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고마움과 감동의 단어로 내게 각인되어온 페이스메이커의 의미가 최근의 정치 상황에서 퇴색되지 않기를,그리고 우리 사회의 과열된 대립 현장에서 정해진 룰을 지킬 줄 아는 진정한 페이스메이커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보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