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 哲 鎬 <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위원장 ilpa-song@ombudsman.go.kr >

1990년 여름 중국을 처음 여행했다.

당시는 중국이 우리나라와 수교 전이어서 생소하기도 했지만 중국에 대한 첫인상은 덩치만 클 뿐 어쩐지 어설프고 무질서한 나라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때의 중국은 잠이 덜 깬 우직한 거인 같은 나라로 보였다.

홍콩,베이징,선양,옌볜,백두산을 거치는 여행길에 수많은 것을 느꼈지만 옌볜에서의 조선족 동포와의 만남은 지금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둑어둑해진 시내 보도를 혼자 걷고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길거리에 주저앉아 대화하고 있던 사람들이 내게 불쑥 말을 걸어왔다.

"혹시 남조선에서 오신 분 아닙니까?" 은근히 겁이 났지만 호기심에 다가서며 물었다.

"한국에서 온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행색을 보면 금방 알지요. 이리 와서 맥주 한잔 하고 가시라요." 나는 이렇게 해서 길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그들과 맥주를 마시며 어울리게 되었다.

그들의 행색은 비록 반바지에 소매 없는 러닝셔츠 차림이었지만 한 사람은 대학 교수,또 한 사람은 기자였다.

그들은 중국의 정치,경제상황,조선족 동포들의 생활,북한에서의 경험담 등 당시로서는 듣기 힘든 소중한 얘기들을 아낌없이 들려 주었다.

나중에는 흥에 겨워 '선구자' 등 노래까지도 함께 불러댔다.

안주는 양 꼬치구이라는 것이었는데,쇠꼬챙이에 잘게 썬 양고기를 꿰어 숯불 위에서 구운 다음 소스에 찍어 먹는 것으로 맛이 천하일품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에 갈 때마다 그 느낌이 달라졌다.

거인이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는 듯하더니 어느덧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했고,이제는 온 세계를 덮을 것 같은 기세다.

조선족 동포들이 자본주의에 눈 뜨면서 옌볜도 변했다. 조선족 인심도 예전과 다르다.

최근 가까운 친구는 이런 고충을 토로했다.

큰아들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프레스에 손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한국에서 신부를 구할 수 없어 옌볜에서 어렵게 모셔왔고,신부의 부모 형제도 한국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부가 달라졌단다. 아들을 멀리하고 무시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이제 우리나라 어디에든 조선족 동포들이 있다. 심지어 내가 사는 동네 시장에 양 꼬치구이 가게도 몇 개 생겼다. 며칠 전 혼자서 들러 봤다. 17년 전 옌볜에서의 양 꼬치구이를 되살리면서. 그런데 영 아니었다.

기구는 비교할 수 없이 세련됐지만 고기도,소스도 옛날 그 맛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급속히 진행되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옌볜에서 느꼈던 따뜻한 인정과 양 꼬치구이의 맛을 다시 찾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