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중앙아시아 등 이머징 마켓은 기회의 땅… 한국증시 성장성 여전"


1970년대 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개발도상국의 투자가능성을 엿본 이가 있었다.

미국 뱅커스트러스트에 근무하던 그는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남짓에 불과하던 한국을 방문해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10년의 연구로 신념을 굳힌 그는 1981년 뉴욕에서 이들 국가에 투자하는 사모펀드를 만들면서 잠재력이 넘치는 개발도상국을 통칭하는 말로 '이머징 마켓(Emerging Market)'이라는 용어를 붙였다.

지금은 신흥시장을 통칭하는 용어가 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이머징 마켓 투자 전문가인 앙트완 반 아그마엘 EMM(Emerging Markets Management) 회장이다.

EMM은 이머징 마켓에만 투자하는 펀드로 현재 200억달러를 운용하고 있다.

한국에는 가장 많은 30억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아그마엘 회장은 최근 출간한 '이머징마켓의 시대'라는 저서에서 "이머징 마켓은 앞으로 25년 안에 서구권을 넘어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며 각 산업부문에서 글로벌 경제를 주도할 25개의 이머징 마켓 기업를 뽑아 그 성공비결을 소개했다.

한국 기업은 가장 많은 4개 기업(삼성전자,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포스코)이 선정됐다.

아그마엘 회장은 한국경제신문과 가진 대담을 통해 "한국 기업은 이미 신흥시장의 범주를 뛰어넘고 있다"며 "앞으로 이머징 마켓은 글로벌 경제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한국 기업들도 이머징 마켓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머징 마켓은 중요한 시장이 됐지만 리스크 측면에서는 문제가 여전하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가 발생하자 글로벌 펀드들이 이머징 마켓에서 투자자금을 빼고 있다.

"이머징 마켓 자체의 리스크라고 보기는 어렵다.

글로벌 투자환경이 더욱 긴밀하게 연결돼가고 있기 때문에 서프프라임 모기지 쇼크가 이머징 마켓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최근 이머징 마켓 투자 수익률이 높아서 이 기회에 수익을 실현하자는 행동으로 이어진 측면도 있다.

오히려 이런 조장은 시장에 긍정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

이머징 마켓이 위험하다고들 말하지만 이번 위기는 사실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미국을 안전한 투자처라고 생각하는 건 20세기형 사고일 뿐이다.

이번 서브프라임 모기지 쇼크는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리스크가 높아질 수 있다는 징후 같은 것으로 봐야 한다.

미국은 최근까지 과소비,저투자 성향을 보였고 다른 선진국의 사정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머징 마켓은 여전히 소비는 적고 투자가 많다.

투자기회는 이제 선진국에서 이머징 마켓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당신이 말하는 이머징 마켓은 성장 가능성이 높은 한국과 중국 대만 인도 브라질 등인가?

"앞으로 주목해야 할 나라가 많다.

라틴아메리카에는 멕시코 외에도 적잖은 신흥국들이 있고 동유럽도 마찬가지다.

특히 카자흐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SK그룹이 이곳에 진출하는 등 글로벌 기업들의 진출이 활발하지만 여전히 미개척 분야가 많다."

―최근 중국 인도 등의 기업들이 선진국 기업이나 기간산업체를 인수하면서 선진국 국민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선진국과 이머징 마켓 간의 마찰 문제가 생겨나지 않겠나?

"잠재적인 걸림돌은 되겠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선진국들은 이머징 마켓의 세기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70년대 일본에 대한 인식과 비슷하다.

저항은 상당 기간 있겠지만 인식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최근 저서에서 이머징 마켓의 리더 기업 25개를 선정했는데 선택 기준은 무엇인가?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가장 중요하게 봤다.

이들 25개사는 규모나 재무구조,품질 경쟁력 측면에서 이미 글로벌화해 있다.

이들 기업은 사업 초기부터 국내가 아닌 세계 최고기업들을 벤치마크 대상으로 삼아왔으며 관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있는 게 특징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마인드 설정이 필요하다."

―한국 기업에 특히 높은 점수를 줬는데.

"한국 기업들의 성과는 눈부시다.

삼성전자의 경우 1978년 처음 방문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업이 됐다.

최근 중국을 비롯한 경쟁자들의 공격적 경영으로 위기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항상 도전은 있게 마련이다.

삼성전자도 이 같은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다.

현대차도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글로벌 자동차 업체로 성장했다.

현대차가 20여년 전 미국 진출을 추진할 때만 해도 투나잇쇼와 같은 TV프로그램에서 조롱을 받기도 했다.

당시 현대차가 도요타를 따라잡겠다고 공언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여겼지만 지금은 그들이 얼마나 그 차이를 좁혀왔는지 알 수 있다.

현대중공업과 포스코 역시 해당 업계에서 글로벌 최고 수준을 달리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중국 조선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많은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

최근 포스코가 개발한 파이넥스 공법은 철강 부문에서 이 회사의 경쟁력이 정점에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 기업 외에도 이 기준에 부합할 만한 한국 기업들이 있는가.

"전자 부문에서는 LG전자가 기준을 총족한다.

조선에서는 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등이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

브랜드 파워는 약하지만 주목할 회사들도 많다.

금융과 엔터테인먼트 게임 등의 분야에서 잠재성을 가진 기업들을 지켜봐야 한다.

특히 한국의 IT(정보기술)기업들은 흥미롭다.

한국의 기업들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상당한 변화를 보였다.

한국은 그 이후 'Korea 1.0'에서 'Korea 2.0'으로 탈바꿈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에 대해 일본과 중국 사이의 샌드위치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창의적인 해결책이 많이 있다.

R&D(연구·개발)에 더 집중하고 디자인과 기술을 융합해야 한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브랜드도 육성해야 한다.

한국은 아직 패션,게임과 같은 발전가능성이 큰 산업분야가 있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새롭게 변해야 한다.

벤치마킹할 대상이 점점 줄고 있기 때문에 이제 스스로 창의성을 높여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기업들이 발견하지 못한 새 시장을 발굴해야 한다.

한국 기업들은 특히 다른 이머징 마켓의 존재를 잊지 말아야 된다.

삼성과 현대차 같은 기업들이 최근 이머징 마켓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국 기업들은 앞으로 글로벌 회사가 되기 위해서 경영진과 실무진의 해외 인력 채용과 해외 문화 수용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

사내 영어 사용에 대해서도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투자자 입장에서 한국 증시는 어떤가.

한국증시는 올 들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지만 이후 외국인들이 매도세를 보이고 있다.

"외국계 투자자들은 여전히 한국기업들의 투자가치가 크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외국인의 매도세가 이어질 수는 있지만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국내 연기금 투자가 늘어나는 등 증시기반이 확충되고 있다.

한국 증시의 성장성은 여전히 높은 편이다."

―한국 투자자들에게 들려줄 조언이 있다면.

"좀더 해외 포트폴리오를 늘려나갈 필요가 있다.

모두가 변동성에 대해 우려할 때 기회가 생기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만 지나치게 증권사의 분석에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머징 마켓은 기회의 땅이다.

나는 미국 대학생들에게 재학 중 1년은 반드시 이머징 마켓에 가서 살고,또 이머징 마켓의 언어 하나씩은 배우라고 조언하고 있다.

한국 젊은이들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

정리=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