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배추 화물차 영업해 건설업 종자돈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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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때 홀로 상경…죽기살기로 벌었지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은 그야말로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다.
성 회장은 1951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100원으로 출발해 매출 2조원의 그룹을 만든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언론의 인터뷰를 극히 꺼려 한국경제신문의 이번 인터뷰도 몇 번의 고사 끝에 어렵게 이뤄졌다.
성 회장의 사무실은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에 있는 경남기업 사옥에 있다.
과거 프로레슬링 챔피언인 김일의 체육관이 있던 곳이다.
본인 표현대로 '촌놈'이던 그가 젊은 시절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주변에서 가장 큰 빌딩이어서 1986년 매입해 21년째 사옥으로 쓰고 있다.
인터뷰는 지난 11일 오후 7시께 시작해 성 회장의 사무실과 그가 잘 다니는 인근 조개구이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다음 날 거의 새벽 1시까지 6시간 가까이 진행됐지만, 기자들은 그의 구수한 말솜씨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주인이 내온 가을 전어를 보며) 전어는 요즘이 제철이라죠.충청도 분들은 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회장님은 어떠세요.
"충청도 사람들은 내륙이 많아서 그런지 회를 잘 모르죠.생선이라야 고등어자반 정도나 좋아할까.
저는 회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건강관리를 하려면 일식이 좋아요."
-건강은 어떠신지요.
"몇 년 전부터 온 몸이 쑤시는 통증이 와서 꾸준히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어려서 남의 집 마루 밑에서 가마니만 덮고 잤던 것의 후유증으로 한기(寒氣)가 들어 생긴 '냉병'이라고 하더군요.
그동안 한방이든 양방이든 안해본 치료가 없어요.
다행히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서너 달 뒤면 완전히 회복될 것 같아요.
지금 제 얼굴이 보기 괜찮지요?(웃음)"
#어린 시절,처절한 생존
-아주 힘든 어린 시절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자서전을 가리키며) 책에도 썼지만 고향인 서산시 해미면 집에 살던 어릴 때 아버님이 계모를 들여 무척 힘든 시절을 보냈어요.
계모가 안방까지 차지하면서 어머니와 나,동생들 세 명이 꼼짝없이 거리로 나앉았으니까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는데,동짓달 무렵이어서 그렇게 추웠는데도 잘 곳이 없었죠.지금 냉병도 그때 생겼어요."
-자서전 제목이 '새벽빛'인데 특별한 뜻이 있습니까?
"집에서 쫓겨났을 때였는데,아주 이른 새벽에 어머니가 깨우더라고요.
끼니도 잇기 힘들 때인데 어디서 구하셨는지 인절미 20~30개쯤인가를 펼쳐놓고 먹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동생들도 깨워 정신없이 먹고 나니 어머니가 동생들 잘 돌보라고 하시곤,컴컴한 새벽에 보따리를 싸들고 나가시는 겁니다.
그래 울면서 한참을 쫓아갔는데 그만 고개에서 어머니를 놓쳤어요.
한 시간이 넘도록 울고불고 했는데 그때 동이 텄죠.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처량했겠어요.
어린 나이지만 이를 악물기도 했던 거 같고…. 그때를 평생 잊을 수 없어요.
그래서 책 제목을 그렇게 지었죠.또 어렵게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자는 뜻도 있어요.
그게 어필했는지 벌써 10만권이 팔렸다는군요.
이만 하면 베스트셀러 작가죠.(웃음)"
#단돈 100원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어머니는 언제 다시 만나셨나요?
"어머니가 떠나고 나서 먹고 살기가 막막해 어쩔 수 없이 동생들을 데리고 계모를 찾아갔지요.
거기서 매질과 구박 속에 살다가 1년쯤 지났을까.
백리(40Km)쯤 떨어져 있는 외갓집으로 도망갔는데,그 집 장롱에서 어머니 편지를 찾아냈죠.서울 영등포에서 식모생활을 하고 계시더군요.
외삼촌이 100원인가 쥐어줘서 어머니 주소지만 들고 무작정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밤 11시쯤인가 영등포역에 내렸는데,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때 김장배추를 실어 나르는 마음 좋은 3륜차 운전사를 만나 저녁밥을 얻어 먹고 다음 날 차를 얻어 타고 가서 기적처럼 어머니를 만났죠."
-고마운 분을 만나셨네요.
"이상하게 내가 살아온 삶을 보면 그래요.
고비 때마다 여러 분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았어요.
어머니를 찾은 후에도 그랬어요.
어머니가 식모살이로 얹혀 사는 처지인데 마냥 거기에 있을 수가 없어서 집을 나왔는데 마침 근처 산비탈에 개척교회가 하나 있었어요.
도병희 전도사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이 분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니까 교회에서 지내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먹고 자면서 새벽엔 신문을 돌리고,낮에는 약국에서 심부름하면서 한 7년을 보냈어요."
-의지가 대단하셨네요.
돈은 많이 버셨습니까?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벌었죠.동생들이 눈에 밟히니까요.
어머니와 내가 그렇게 7년을 버니까 제법 돈이 모였어요.
그 돈으로 고향에 조그마한 집을 하나 사서 다시 내려갔어요.
그곳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먹여 살리려고 공사판에서 등짐을 지기 시작했죠."
#23살때 배추화물 사업
-사업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요령없이 등짐을 지다 보니 등창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큼지막하게 '이명래 고약'을 붙이곤 두세 달 꼼짝없이 누워 있다가 다른 일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때 동네 이장이 배추장사를 했는데 거기서 처음엔 배추를 김장차에 싣는 허드렛일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김장차가 배추를 떼어주고 받는 운임료가 만만치 않더라고요.
당시 쌀 한 가마니가 4000원 할 때인데 운임료가 하루에 1만5000원에서 2만원까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들이고 돈을 빌려서 화물차 영업점을 냈지요.
당시 영업점 사장 중에 내가 제일 젊었어요.
스물세 살밖에 안 됐으니까."
-첫 사업이신 셈이네요.
건설업은 언제부터 하신 겁니까?
"화물차 영업을 한 1년 하니까 160만원이 손에 남았어요.
당시엔 큰 돈이었지요.
그래서 아예 중고 화물차를 사서 직접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다른 사업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해미면에서 건설업을 하던 지인이 날 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건설업도 지입제였어요.
건설업체가 많지 않아 시·군에 하나꼴이었지요.
그 업체들이 본사에 수수료를 주고 지역공사는 지역 업체가 도맡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조합장이 해미면 공사권을 나한테 넘기겠다는 겁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지분을 사가라는 거였죠.해볼만하다고 생각해 돈을 긁어모으고 빚도 끌어안아 시작했지요.
막상 해보니까 공사를 따기만 하면 25%는 남는 좋은 장사였어요."
#사업 초창기, 솔직한 태도로 위기 모면
-그래도 건설업에는 문외한이었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사실 나이도 젊고 건설업도 모르다 보니 처음엔 경험 많은 하청업체 사장들이 하라는 대로 했었지요.
옆에서 구경하는 처지였다고나 할까.
그러던 어느날 문제가 터졌어요.
바깥 일을 보고 회사로 들어갔더니 관청에서 공무원이 공사 감리를 나왔는데 부실 시공 판정이 내려졌다는 거예요.
하고 있던 도로공사를 몽땅 다시 할 판이었습니다.
실제 부실공사였어요.
하청업체에서 철근 등을 빼먹고 시공한 거예요.
하여간 그때 하청업체 사장들이 다 난리가 났어요.
그러면서 나보고 그 공무원을 찾아가서 '신고식'을 하라는 겁니다.
봉투를 주라는 얘기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생면부지의 공무원 집을 찾아가기도 뭣한데,봉투까지 들고 가는 게 영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사과 한 상자만 달랑 들고 밤중에 찾아갔어요.
처음엔 문을 열어주지 않다가 밤 12시가 넘어서야 문을 열어주더군요.
그 사과상자를 들고 안방에 들어가니 공무원이 대뜸 사과상자는 왜 갖고 들어왔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당장 쏟으라고 하더군요.
돈뭉치가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요.
시키는 대로 쏟았더니 사과상자에 있던 왕겨가 안방에 몽땅 쏟아졌을 수밖에.방바닥은 난장판이 됐고….그걸 치우던 안주인을 생각하면 지금도 민망해요.
(일동 웃음)"
-아마도 강직한 공무원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랬죠.나보다 열 살 정도 위였던 양반이었어요,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솔직해서 마음에 든다.
험한 길을 들어섰는데,그런 자세로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둥 칭찬을 하더라고요.
그 집을 나온 게 새벽 2시반이 넘었어요.
눈을 붙이고 오후에 현장에 나가 보니 그 공무원이 다시 찾아왔어요.
그리곤 하청업체 사장들을 혼내는 거야.그러면서 젊은 사장을 봐서 이번 한번은 넘어갈 테니 대신 보강공사를 하라고 하더군요.
첫 위기를 넘겼던 셈이죠."
#20대 후반부터는 승승장구
-그때부터 사업이 승승장구하셨나요?
"사업이 점점 커져 어느새 지역 유지로 알아주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스물여섯 살쯤이에요.
서산에 자가용이 4대밖에 없던 때였는데,내가 한 대를 타고 다녔을 정도였어요.
그러다 보니 지역 국회의원 등 높은 사람들과도 친해지기 시작했어요.
이 분들이 이리저리 편의를 봐주고 도움도 주고 해서 충청도에서는 두세 번째 가는 건설업체로 컸죠."
-젊은 나이에 돈도 꽤 벌었을 때인데 결혼에 대한 관심은 없으셨나요?
"20대 초반까지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생존 문제가 달린 때라 그런 일에는 신경쓸 경황이 없었어요.
그러다 제법 자리를 잡으니까 여기저기서 맞선이 들어왔지요.
한 100번을 본 것 같아요.
그때 군수가 자기 딸을 직접 중매했을 정도니까요.
(웃음)"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처는 대학까지 나온 국어선생님이었는데 서산시 해미면의 같은 하숙집에 있다가 눈이 맞았죠.
내 아버지 얘기며 지난 과거를 솔직하게 말하면서 자연스레 사귀게 됐죠.
대학은커녕 초등학교도 제대로 안 다녔으니 나한테는 과분한 사람이었죠.와이프는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사람한테 시집간다는 말을 차마 못하겠다고 하고….
그래서 뒤늦게 포천에 있는 고등학교를 4개월인가 다니면서 졸업장을 땄습니다.
문제는 또 있었어요.
당시 경찰서장이던 장인 어른께서 아주 엄격하신 분이라 연애결혼은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고민 끝에 장인 어른과 친분이 있던 모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중매를 서 달라고 부탁했지요.
안사람을 처음 보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지요."
-지금은 들통나셨겠네요.
"장인 어른이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데 이 얘긴 아마 아직도 모르실 걸요?(일동 웃음) 4개월짜리 고교 졸업장은 버렸습니다.
요즘 문제가 되는 것도 다 그런거잖아요?(웃음)"
#100원으로 시작해 2조원 규모 그룹 키워
-그 후에 경남기업 등을 인수하셔서 지금은 매출액이 2조원인 그룹이 됐는데요.
"1982년에 대아건설,2004년엔 경남기업을 인수해 지금의 틀을 갖췄죠.단돈 100원 들고 상경해 매출 2조원대 그룹을 일궜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거죠?"
-얼마 전 베트남에서 큰 사업을 수주하셨죠.
"그 사업은 수익성이 아주 좋습니다(경남기업은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70층짜리 호텔을 포함한 복합단지인 '경남 하노이 랜드마크타워' 공사를 수주했다). 거기서 남는 이익만 1억5000만달러 정도 됩니다.
수익률이 연 12%가 넘어요.
운도 좋았어요.
다른 업체들은 4~5년 걸리는 인·허가를 6개월 만에 받았으니까.
대기업들도 부러워해요.
사실 우린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일을 추진하는 스타일입니다.
떠들기만 하면 뭐해.꿩 잡는 게 매라고.실적이 중요하잖아요?"
#"정치에 미련 없어요"
-혹시 다시 정치하실 뜻은 없으세요(성 회장은 지난 16대 총선에서 자민련 전국구 2위였다가 비례득표율 미달로 뜻을 접었다).
"미련 없습니다.
세상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더라고요.
(웃음) 더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서산장학재단이 그것입니다.
재단은 1990년에 30억원을 털어 만들었죠.18년 동안 1만1000명 정도의 학생이 혜택을 받았어요.
그동안 들어간 돈이 140억~150억원은 될 겁니다.
내가 못 배워서 그런지 훌륭한 인재를 키우는 일이야말로 가장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돼요."
-장학재단을 더 키우실 생각이신가요.
"앞으로의 꿈이라면 재단을 미국의 록펠러재단이나 카네기재단처럼 키우는 일입니다.
어려운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고 싶어요.
미국도 백인·흑인·황인 등이 함께 어울려 잘 살잖아요? 그렇게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정치보다,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더 값진 삶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은 학연이 지연보다 더 강해
-지금까지 사업을 하는 동안 어떤 점이 어려우셨나요?
"우리나라는 학연이 굉장히 강해요.
지연도 있지만,학연이 더 세요.
학벌이 안 되면 인간을 부인하니까…. 난 학교 졸업장이 없잖아요? 그동안 정말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인정해 주는 사회가 돼야 해요.
국가의 장래를 보더라도 분명 짐이에요.
그래서 나는 신입사원의 70% 정도를 지방대생으로 뽑았죠.경남기업을 인수하기 전까지 20년 동안 그렇게 했죠.물론 아무래도 '시골' 출신들이다 보니 유연성이 부족해요.
그렇지만 정직해요.
이런 사람들이 갈수록 업무 경험이 쌓이고 나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경영의 비전은.
"요즘 건설시장 환경이 매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건설업체와 달리 자원,레저,발전 등 연관 산업에 오래 전부터 투자하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사업을 다각화하고 기업 체질을 개선했죠.앞으로 5~10년 후에는 현대건설 같은 굴지의 건설업체로 키울 자신이 있습니다."
정리=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은 그야말로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다.
성 회장은 1951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100원으로 출발해 매출 2조원의 그룹을 만든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언론의 인터뷰를 극히 꺼려 한국경제신문의 이번 인터뷰도 몇 번의 고사 끝에 어렵게 이뤄졌다.
성 회장의 사무실은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에 있는 경남기업 사옥에 있다.
과거 프로레슬링 챔피언인 김일의 체육관이 있던 곳이다.
본인 표현대로 '촌놈'이던 그가 젊은 시절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주변에서 가장 큰 빌딩이어서 1986년 매입해 21년째 사옥으로 쓰고 있다.
인터뷰는 지난 11일 오후 7시께 시작해 성 회장의 사무실과 그가 잘 다니는 인근 조개구이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다음 날 거의 새벽 1시까지 6시간 가까이 진행됐지만, 기자들은 그의 구수한 말솜씨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주인이 내온 가을 전어를 보며) 전어는 요즘이 제철이라죠.충청도 분들은 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회장님은 어떠세요.
"충청도 사람들은 내륙이 많아서 그런지 회를 잘 모르죠.생선이라야 고등어자반 정도나 좋아할까.
저는 회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건강관리를 하려면 일식이 좋아요."
-건강은 어떠신지요.
"몇 년 전부터 온 몸이 쑤시는 통증이 와서 꾸준히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어려서 남의 집 마루 밑에서 가마니만 덮고 잤던 것의 후유증으로 한기(寒氣)가 들어 생긴 '냉병'이라고 하더군요.
그동안 한방이든 양방이든 안해본 치료가 없어요.
다행히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서너 달 뒤면 완전히 회복될 것 같아요.
지금 제 얼굴이 보기 괜찮지요?(웃음)"
#어린 시절,처절한 생존
-아주 힘든 어린 시절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자서전을 가리키며) 책에도 썼지만 고향인 서산시 해미면 집에 살던 어릴 때 아버님이 계모를 들여 무척 힘든 시절을 보냈어요.
계모가 안방까지 차지하면서 어머니와 나,동생들 세 명이 꼼짝없이 거리로 나앉았으니까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는데,동짓달 무렵이어서 그렇게 추웠는데도 잘 곳이 없었죠.지금 냉병도 그때 생겼어요."
-자서전 제목이 '새벽빛'인데 특별한 뜻이 있습니까?
"집에서 쫓겨났을 때였는데,아주 이른 새벽에 어머니가 깨우더라고요.
끼니도 잇기 힘들 때인데 어디서 구하셨는지 인절미 20~30개쯤인가를 펼쳐놓고 먹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동생들도 깨워 정신없이 먹고 나니 어머니가 동생들 잘 돌보라고 하시곤,컴컴한 새벽에 보따리를 싸들고 나가시는 겁니다.
그래 울면서 한참을 쫓아갔는데 그만 고개에서 어머니를 놓쳤어요.
한 시간이 넘도록 울고불고 했는데 그때 동이 텄죠.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처량했겠어요.
어린 나이지만 이를 악물기도 했던 거 같고…. 그때를 평생 잊을 수 없어요.
그래서 책 제목을 그렇게 지었죠.또 어렵게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자는 뜻도 있어요.
그게 어필했는지 벌써 10만권이 팔렸다는군요.
이만 하면 베스트셀러 작가죠.(웃음)"
#단돈 100원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어머니는 언제 다시 만나셨나요?
"어머니가 떠나고 나서 먹고 살기가 막막해 어쩔 수 없이 동생들을 데리고 계모를 찾아갔지요.
거기서 매질과 구박 속에 살다가 1년쯤 지났을까.
백리(40Km)쯤 떨어져 있는 외갓집으로 도망갔는데,그 집 장롱에서 어머니 편지를 찾아냈죠.서울 영등포에서 식모생활을 하고 계시더군요.
외삼촌이 100원인가 쥐어줘서 어머니 주소지만 들고 무작정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밤 11시쯤인가 영등포역에 내렸는데,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때 김장배추를 실어 나르는 마음 좋은 3륜차 운전사를 만나 저녁밥을 얻어 먹고 다음 날 차를 얻어 타고 가서 기적처럼 어머니를 만났죠."
-고마운 분을 만나셨네요.
"이상하게 내가 살아온 삶을 보면 그래요.
고비 때마다 여러 분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았어요.
어머니를 찾은 후에도 그랬어요.
어머니가 식모살이로 얹혀 사는 처지인데 마냥 거기에 있을 수가 없어서 집을 나왔는데 마침 근처 산비탈에 개척교회가 하나 있었어요.
도병희 전도사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이 분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니까 교회에서 지내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먹고 자면서 새벽엔 신문을 돌리고,낮에는 약국에서 심부름하면서 한 7년을 보냈어요."
-의지가 대단하셨네요.
돈은 많이 버셨습니까?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벌었죠.동생들이 눈에 밟히니까요.
어머니와 내가 그렇게 7년을 버니까 제법 돈이 모였어요.
그 돈으로 고향에 조그마한 집을 하나 사서 다시 내려갔어요.
그곳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먹여 살리려고 공사판에서 등짐을 지기 시작했죠."
#23살때 배추화물 사업
-사업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요령없이 등짐을 지다 보니 등창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큼지막하게 '이명래 고약'을 붙이곤 두세 달 꼼짝없이 누워 있다가 다른 일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때 동네 이장이 배추장사를 했는데 거기서 처음엔 배추를 김장차에 싣는 허드렛일을 시작했지요.
그런데 김장차가 배추를 떼어주고 받는 운임료가 만만치 않더라고요.
당시 쌀 한 가마니가 4000원 할 때인데 운임료가 하루에 1만5000원에서 2만원까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들이고 돈을 빌려서 화물차 영업점을 냈지요.
당시 영업점 사장 중에 내가 제일 젊었어요.
스물세 살밖에 안 됐으니까."
-첫 사업이신 셈이네요.
건설업은 언제부터 하신 겁니까?
"화물차 영업을 한 1년 하니까 160만원이 손에 남았어요.
당시엔 큰 돈이었지요.
그래서 아예 중고 화물차를 사서 직접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다른 사업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해미면에서 건설업을 하던 지인이 날 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건설업도 지입제였어요.
건설업체가 많지 않아 시·군에 하나꼴이었지요.
그 업체들이 본사에 수수료를 주고 지역공사는 지역 업체가 도맡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조합장이 해미면 공사권을 나한테 넘기겠다는 겁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지분을 사가라는 거였죠.해볼만하다고 생각해 돈을 긁어모으고 빚도 끌어안아 시작했지요.
막상 해보니까 공사를 따기만 하면 25%는 남는 좋은 장사였어요."
#사업 초창기, 솔직한 태도로 위기 모면
-그래도 건설업에는 문외한이었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사실 나이도 젊고 건설업도 모르다 보니 처음엔 경험 많은 하청업체 사장들이 하라는 대로 했었지요.
옆에서 구경하는 처지였다고나 할까.
그러던 어느날 문제가 터졌어요.
바깥 일을 보고 회사로 들어갔더니 관청에서 공무원이 공사 감리를 나왔는데 부실 시공 판정이 내려졌다는 거예요.
하고 있던 도로공사를 몽땅 다시 할 판이었습니다.
실제 부실공사였어요.
하청업체에서 철근 등을 빼먹고 시공한 거예요.
하여간 그때 하청업체 사장들이 다 난리가 났어요.
그러면서 나보고 그 공무원을 찾아가서 '신고식'을 하라는 겁니다.
봉투를 주라는 얘기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생면부지의 공무원 집을 찾아가기도 뭣한데,봉투까지 들고 가는 게 영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사과 한 상자만 달랑 들고 밤중에 찾아갔어요.
처음엔 문을 열어주지 않다가 밤 12시가 넘어서야 문을 열어주더군요.
그 사과상자를 들고 안방에 들어가니 공무원이 대뜸 사과상자는 왜 갖고 들어왔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당장 쏟으라고 하더군요.
돈뭉치가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요.
시키는 대로 쏟았더니 사과상자에 있던 왕겨가 안방에 몽땅 쏟아졌을 수밖에.방바닥은 난장판이 됐고….그걸 치우던 안주인을 생각하면 지금도 민망해요.
(일동 웃음)"
-아마도 강직한 공무원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랬죠.나보다 열 살 정도 위였던 양반이었어요,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솔직해서 마음에 든다.
험한 길을 들어섰는데,그런 자세로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둥 칭찬을 하더라고요.
그 집을 나온 게 새벽 2시반이 넘었어요.
눈을 붙이고 오후에 현장에 나가 보니 그 공무원이 다시 찾아왔어요.
그리곤 하청업체 사장들을 혼내는 거야.그러면서 젊은 사장을 봐서 이번 한번은 넘어갈 테니 대신 보강공사를 하라고 하더군요.
첫 위기를 넘겼던 셈이죠."
#20대 후반부터는 승승장구
-그때부터 사업이 승승장구하셨나요?
"사업이 점점 커져 어느새 지역 유지로 알아주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스물여섯 살쯤이에요.
서산에 자가용이 4대밖에 없던 때였는데,내가 한 대를 타고 다녔을 정도였어요.
그러다 보니 지역 국회의원 등 높은 사람들과도 친해지기 시작했어요.
이 분들이 이리저리 편의를 봐주고 도움도 주고 해서 충청도에서는 두세 번째 가는 건설업체로 컸죠."
-젊은 나이에 돈도 꽤 벌었을 때인데 결혼에 대한 관심은 없으셨나요?
"20대 초반까지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생존 문제가 달린 때라 그런 일에는 신경쓸 경황이 없었어요.
그러다 제법 자리를 잡으니까 여기저기서 맞선이 들어왔지요.
한 100번을 본 것 같아요.
그때 군수가 자기 딸을 직접 중매했을 정도니까요.
(웃음)"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처는 대학까지 나온 국어선생님이었는데 서산시 해미면의 같은 하숙집에 있다가 눈이 맞았죠.
내 아버지 얘기며 지난 과거를 솔직하게 말하면서 자연스레 사귀게 됐죠.
대학은커녕 초등학교도 제대로 안 다녔으니 나한테는 과분한 사람이었죠.와이프는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사람한테 시집간다는 말을 차마 못하겠다고 하고….
그래서 뒤늦게 포천에 있는 고등학교를 4개월인가 다니면서 졸업장을 땄습니다.
문제는 또 있었어요.
당시 경찰서장이던 장인 어른께서 아주 엄격하신 분이라 연애결혼은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고민 끝에 장인 어른과 친분이 있던 모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중매를 서 달라고 부탁했지요.
안사람을 처음 보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지요."
-지금은 들통나셨겠네요.
"장인 어른이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데 이 얘긴 아마 아직도 모르실 걸요?(일동 웃음) 4개월짜리 고교 졸업장은 버렸습니다.
요즘 문제가 되는 것도 다 그런거잖아요?(웃음)"
#100원으로 시작해 2조원 규모 그룹 키워
-그 후에 경남기업 등을 인수하셔서 지금은 매출액이 2조원인 그룹이 됐는데요.
"1982년에 대아건설,2004년엔 경남기업을 인수해 지금의 틀을 갖췄죠.단돈 100원 들고 상경해 매출 2조원대 그룹을 일궜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거죠?"
-얼마 전 베트남에서 큰 사업을 수주하셨죠.
"그 사업은 수익성이 아주 좋습니다(경남기업은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70층짜리 호텔을 포함한 복합단지인 '경남 하노이 랜드마크타워' 공사를 수주했다). 거기서 남는 이익만 1억5000만달러 정도 됩니다.
수익률이 연 12%가 넘어요.
운도 좋았어요.
다른 업체들은 4~5년 걸리는 인·허가를 6개월 만에 받았으니까.
대기업들도 부러워해요.
사실 우린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일을 추진하는 스타일입니다.
떠들기만 하면 뭐해.꿩 잡는 게 매라고.실적이 중요하잖아요?"
#"정치에 미련 없어요"
-혹시 다시 정치하실 뜻은 없으세요(성 회장은 지난 16대 총선에서 자민련 전국구 2위였다가 비례득표율 미달로 뜻을 접었다).
"미련 없습니다.
세상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더라고요.
(웃음) 더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서산장학재단이 그것입니다.
재단은 1990년에 30억원을 털어 만들었죠.18년 동안 1만1000명 정도의 학생이 혜택을 받았어요.
그동안 들어간 돈이 140억~150억원은 될 겁니다.
내가 못 배워서 그런지 훌륭한 인재를 키우는 일이야말로 가장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돼요."
-장학재단을 더 키우실 생각이신가요.
"앞으로의 꿈이라면 재단을 미국의 록펠러재단이나 카네기재단처럼 키우는 일입니다.
어려운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고 싶어요.
미국도 백인·흑인·황인 등이 함께 어울려 잘 살잖아요? 그렇게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정치보다,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더 값진 삶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은 학연이 지연보다 더 강해
-지금까지 사업을 하는 동안 어떤 점이 어려우셨나요?
"우리나라는 학연이 굉장히 강해요.
지연도 있지만,학연이 더 세요.
학벌이 안 되면 인간을 부인하니까…. 난 학교 졸업장이 없잖아요? 그동안 정말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인정해 주는 사회가 돼야 해요.
국가의 장래를 보더라도 분명 짐이에요.
그래서 나는 신입사원의 70% 정도를 지방대생으로 뽑았죠.경남기업을 인수하기 전까지 20년 동안 그렇게 했죠.물론 아무래도 '시골' 출신들이다 보니 유연성이 부족해요.
그렇지만 정직해요.
이런 사람들이 갈수록 업무 경험이 쌓이고 나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경영의 비전은.
"요즘 건설시장 환경이 매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건설업체와 달리 자원,레저,발전 등 연관 산업에 오래 전부터 투자하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사업을 다각화하고 기업 체질을 개선했죠.앞으로 5~10년 후에는 현대건설 같은 굴지의 건설업체로 키울 자신이 있습니다."
정리=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