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수·합병(M&A) 시장의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그동안은 주로 선진국 자본이 개발도상국 기업들을 인수해 왔다.

최근 들어선 개발도상국 자본의 선진국 기업 인수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는 선진 기업에 새로운 자금을 공급하는 한편 개발도상국 기업에 선진 기업의 운영 기법을 도입케 함으로써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긴밀성을 더욱 높이는 효과를 내고 있다.

세계화가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는 평가도 낳고 있다.

올 들어 지난 10일까지 개발도상국 자본이 인수한 선진국 기업들의 자산은 총 1280억달러에 달한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시장조사기관인 딜로직의 자료를 인용해 17일 보도했다.

이는 2003년의 140억달러보다 9배 이상 늘어난 수준이다.

같은 기간 선진국 자본이 M&A한 개도국 기업의 자산은 1300억달러로 개도국이 주도한 M&A 규모와 큰 차이가 없다.

이런 추세라면 조만간 개도국 자본에 의한 M&A 규모가 선진국 자본이 주도하는 M&A를 추월할 전망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파문으로 선진국 자본의 M&A가 주춤해진 최근엔 개도국이 주도하는 M&A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카타르의 국영투자펀드인 '델타 커머셜 프라퍼티'는 최근 영국의 대형 유통업체인 세인즈버리를 인수했다.

브라질 기업인 발레도리오도세(CVRD)도 캐나다 광산업체인 인코(Inco)를 사들였다.

대만의 PC업체인 에이서도 미국의 게이트웨이를 접수했다.

그런가 하면 카타르 투자청은 나스닥이 내놓은 런던증권거래소의 지분 30%를 인수하기 위한 입찰에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선진국 기업들의 먹잇감이던 개도국들이 오히려 선진국 기업 사냥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개도국 자본이 M&A시장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오일머니와 외환보유액 증가 등으로 이른바 '국부펀드(Sovereign Wealth Fund)' 규모가 늘어난 것이 주된 요인이다.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중동 산유국의 국부펀드 규모는 1조5000억달러에 달한다.

세계 헤지펀드와 맞먹는 규모다.

이들은 투자 효율화 측면에서 최근 선진 각국 기업 인수에 나서고 있다.

개도국 기업들의 부(富)가 급증한 것도 한 요인이다.

세계경제의 기관차로 등장한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기업들은 경제 호황에 힘입어 막강한 자금력을 축적했다.

이 자금은 선진국 기업들을 정면 겨냥하고 있다.

프랭스 이어리 씨티그룹 애널리스트는 "지난 4년간 주가 상승에 힘입어 개도국 기업들의 자금 동원력이 크게 개선됐다"며 "특히 브릭스 대기업들이 세계 M&A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사상 최고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세계 M&A의 주역으로 부상한 개도국 자본의 특징은 신용위기 등 시장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차입 규모는 작은 반면 오일머니 등으로 자체 자금은 꾸준히 늘고 있다.

주로 차입에 의존해 M&A를 주도하다 최근 질곡에 빠진 선진국의 사모펀드 등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신용위기 상황이 길어질수록 M&A의 주도권은 이들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다.

조셉 퀸란 뱅크오브아메리카 수석 투자전략가는 "선진국 자본이 신용위기에 발목을 잡힌 사이 개도국 자본이 M&A시장의 전면에 등장했다"고 말했다.

개도국 자본의 활발한 선진국 기업 M&A는 선진국들의 보호주의를 낳고 있다.

작년 미국 항만 운영권을 사들인 두바이포트월드에 되팔도록 압력을 가한 미국이 대표적이다.

독일과 프랑스도 지난 7월 국부펀드의 기업 인수와 관련해 유럽연합(EU) 차원의 통합된 규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렇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개도국이 M&A시장을 주도함으로써 선진국과 개도국 간 자금 및 기업 경영 노하우가 활발히 이전돼 국가 간 긴밀성을 높이는 효과를 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선진국에 의한 세계화가 이제 선진국과 개도국이 동반하는 세계화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