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한가위] 행복합니다 그리고 설렙니다…고향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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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향에 대해 남다른 애틋함을 지니고 살았다.
지금도 고향 갈 때가 되면 마음이 설레고,유년을 보냈던 동네는 거닐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내가 유난히 정이 많거나 내 고향이 특별히 대단한 곳이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초등학교 동창들과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니 정이 깊다면 깊은 사람일 것이고,또 내 고향으로 말하더라도 유행가에 자주 등장하는 남쪽의 항구도시라,특별하지 않다고 하면 고향이 조금 서운해 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쨌든 이런 것보다는 좀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나 혼자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릴 적에 고향을 떠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혼자서 서울로 유학을 왔다.
사연이 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기 유학을 떠나온 셈이 되어 버렸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좀 더 절실한 마음으로 방학을 기다렸다.
마침내 기다리던 방학이 오고,무거운 가방을 끌고 기차에 올라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드디어 기차는 산모퉁이를 돌아 고향 시내로 접어든다.
건널목이 있던 바로 그 지점에서 기차는 늘 경적을 울리곤 했다.
그때 그 순간,아,그 경적 소리조차 아련하게 만들어버리던 내 심장의 고동 소리,왼편으로 휘어지는 기차가 내 눈앞에 우르르 쏟아놓던 그리웠던 풍경들,그리고 그와 함께 밀려드는 정서의 해일 앞에서 가눌 수 없이 휘청거리며 설레던 내 마음.30년이 넘게 지난 기억인데도 나는 아직 그 순간의 느낌들을 감탄사 없이 불러낼 수가 없다.
기차역 승강장 밖 쇠살 문 너머엔 아버지가 자전거를 세우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아버지의 키 너머에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낯익은 산봉우리,그리고 내 코끝에 와 닿던 익숙한 바다 냄새.이런 귀향의 제의를 일년에 두 차례씩 꼬박꼬박 치르며 나는 10대의 후반부를 보냈다.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주한 이후에도 나는 자주 고향을 찾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스물두엇이었던 나는 혼자서 고향의 산을 오르고 있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드나들었던 작은 굴이 있었다.
너구리굴처럼 입구는 좁았지만 안은 제법 넓고 아늑해서 우리는 그곳을 아지트로 정해 놓고 양초며,먹을 것이며 이것저것 채워두었다.
굴 벽에 움직거리는 바위틈이 있어 십원짜리 동전 하나를 넣어 두기도 했다.
나중에 다시 가보았을 때도 바위틈의 동전만은 다른 사람들 손을 타지 않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배낭 하나 메고 그 굴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 동전을 찾아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굴이 있던 장소는 찾을 수 있었으나 막상 내가 기억하고 있던 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 몸이 들어갈 수 없는 자그마한 구멍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도리가 없었다.
내가 두고 온 유년의 굴은 이제 내 몸의 입장을 거절하고 있었다.
그 동전도 나는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던 겨울날의 일이었다.
그때 그 작아져 버린 굴 입구에서 나는 생각했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와 함께 이곳에 오면 된다.
내 아이에게 아버지가 감추어 둔 동전을 찾아오게 하겠노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했었다.
아마도 펑펑 쏟아지고 있던 눈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제 내 아이는 적당한 나이가 되었다.
한두 해 더 지나면 그 아이의 몸도 거부당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아이를 굴속으로 들여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고향과 추억을 만드는 일이다.
내게 허용된 일이란 그저 자전거를 세워 놓고 아이를 기다리는 정도의 역할일 것이다.
그 시절에 읽었던 책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추억은 악마의 지갑 속에 든 지폐이다.
지갑 속에 있을 때는 지폐이지만 지갑을 열면 낙엽으로 변해 버린다는 것이다.
고향도,추억도 그런 것임을 이제는 나도 안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고향으로 갈 때면 내 마음은 지금도 설렌다.
그 설렘만으로도 고향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서영채 시인·문학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