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기피대상 1호 불구 어린이들에겐 4300억원 기부


지난 2월 네덜란드 최대 은행인 ABN암로의 이사회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발신처는 아동투자펀드(TCI·The Children's Investment Fund)라는 헤지펀드.편지를 받아든 이사들은 긴장했다.

"ABN암로를 시장에 매물로 내놓아야 한다"는 편지의 내용도 충격적이었지만 이보다는 TCI의 설립자가 '크리스토퍼 혼(40)'이라는 사실이 이사들의 심장을 더욱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TCI는 ABN암로의 지분 1%를 갖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일 "금융업계 사상 최대 빅딜인 ABN암로 인수전에서 혼의 행보가 주요 변수로 부각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혼은 적극적인 주주 행동주의자로 기업 입장에서는 기피대상 1호다.

먹잇감으로 정한 기업이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가차없이 공격에 들어간다.

한 번 당한 기업 이사들은 혼의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혼의 무서움은 그의 집요함에서 나온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설명했다.

해당 기업 이사들은 한밤중이나 새벽에 혼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라기 일쑤다.

궁금한 사항에 대해서는 답이 나올때까지 수십 차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주주들은 기업 경영에 대해 알권리가 있다'는 원론적인 주장과 함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도 않는다.

필요하면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작년 9월 유럽지역 증권거래소를 운영하는 '유로넥스트'는 뉴욕 증권거래소와 독일 증권거래소인 '도이체 뵈르제' 중 어느 곳과 합병할지를 놓고 고민 중이었다.

독일 쪽을 선호했던 혼은 미국 쪽에 무게를 두고 협상을 진행하는 유로넥스트의 최고경영자(CEO)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곧바로 비수를 날렸다.

언론에 "유로넥스트 CEO인 베르너 사이페르트가 미국식 인센티브에 눈이 멀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고 악선전을 한 것이다.

사이페르트는 자서전을 통해 그때의 상황을 '메뚜기떼의 공격'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불쾌하고 두려웠다는 얘기다.

혼은 이처럼 기업들에는 '악몽'같은 존재지만 일에서만 벗어나면 '천사'로 변한다.

특히 펀드의 이름에 '아이들(children)'이라는 단어를 붙일 정도로 아프리카 등의 불우한 아이들을 돌보는데 열성이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혼이 작년 한 해 동안 자선단체인 '어린이투자펀드재단(CIFF)'에 2억3000만파운드(약 4300억원)를 기부했다고 최근 보도했다.

이 같은 기부 규모는 영국 사람이 한 해에 출연한 금액으로는 사상 최대다.

국제구호단체인 '국경없는 의사들'도 혼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

TCI에 투자한 사람들도 혼을 높게 평가한다.

어느 펀드보다 고수익을 안겨주기 때문.TCI는 지난해 40%의 수익률을 기록했고 올해도 업계 평균보다 높은 수익률을 유지하고 있다.

'투자'와 '기부' 양쪽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혼.그래서 그의 별명은 '영국의 워런 버핏'이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