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 분석] 58명의 역대 일본 총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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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부시가문에서 부자 대통령이 등장한데 이어 일본에서도 부자 총리가 탄생해 화제다.
지난달 25일 내각을 발족한 후쿠다 야스오 총리(71)는 1976년 말부터 2년간 총리를 지낸 후쿠다 다케오의 장남이다.
일본 헌법에서 국가의 상징은 천황으로 명문화돼 있다.
그러나 천황은 '존재'하지만 '군림'하지 않는다.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고,국정을 총괄하는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는 '내각총리대신(총리)'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나선 일본은 1885년 내각책임제를 도입했다.
지난 122년 동안 총리가 된 인물은 초대 이토 히로부미 부터 현 후쿠다 야스오까지 총 58명이다.
일본에서 총리가 되려면 우선 국회의원으로 선출돼야 한다.
국회는 양원제로 중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이 있으나 중의원 우선 원칙에 따라 총리는 중의원에서 뽑는다.
지난달 25일 치러진 국회의 총리 지명 선거에서도 야당이 다수당인 참의원에선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 대표를 총리후보로 지명됐으나,결국 중의원에서 지명된 후쿠다 자민당 총리가 총리 자리에 올랐다.
총리의 급료는 월 220만엔(약1800만원) 정도.연간 600만엔정도의 보너스가 있고,통근 수당 등을 받는다.
총리의 면면을 살펴보면 일본 근현대사를 한눈에 읽을 수 있다.
군국주의 체제를 만들어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주변국을 침략,어두운 역사를 남겼는가 하면 패망한 일본을 다시 일으켜 세워 경제대국으로 부활시킨 지도자들도 있다.
1대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비롯,일본총리들은 한국과도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이토 총리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따라 한국의 초대 통감을 맡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식민통치의 원흉'으로 각인돼 있다.
그는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서구 열강과 러시아 등에 맞서 일본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강국으로 가는 초석을 다진 '현대화'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다.
50년이 넘는 자민당의 장기 집권을 가져온 인물로는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가 꼽힌다.
1954년 민주당을 결성,12월에 총리가 된 하토야마는 이듬해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자유민주당(자민당)이 탄생하자 총리직을 맡았다.
그는 국민적 지지를 배경으로 국내에선 보수당의 합당을 이끌어 내 정치적 안정을 달성했고,대외적으로 소련과의 국교 회복과 유엔 가입 등 굵직한 외교 현안을 해결했다.
자민당의 황금기를 열었던 인물은 7년8월간 전후 최장수 내각을 이끌었던 사토 에이사쿠 총리다.
그는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재임하면서 정치 안정과 함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오키나와 반환 협정을 성사시켰으며,'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과 핵확산 금지 조약에 조인한 성과를 인정받아 197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1965년 한국과 국교 정상화 조약도 체결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전후 정치를 총결산한 '대통령급' 총리로 평가받고 있다.
5년간 총리를 지낸 그는 1987년 퇴임한 후에도 정계의 '대부'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나카소네는 미국 위상이 약해진 반면 경제 전성기를 맞은 일본의 지위를 십분 활용해 미·일 동맹을 강화시켰고,국내에선 행정·재정 개혁을 추진해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일본 현대 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다.
2001년 4월부터 2006년 9월까지 재임했던 고이즈미 총리는 정가에서 '變人(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50여년간 파벌 정치가 지배해온 자민당에서 비주류로 변방을 떠돌던 그는 '파벌정치 해체''자민당 개혁'을 내걸어 일반 당원과 여론의 지지로 총리에 올랐다.
10년간 계속돼던 장기 불황과 자민당의 구태 정치에 염증을 느낀 민심의 흐름을 읽은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취임 후 당내 계파 안배 대신 총리 주도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해 규제 완화 등 구조개혁 정책을 밀어부쳐 일본경제가 장기불황에서 벗어나 세계경제의 리더로 다시 나설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93년 8월부터 약 8개월간 정권을 잡은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신당 당수는 의원수 35명의 군소정당(당시 자민당 223석) 출신으로 첫 총리직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을 만든 오자와 이치로(현 민주당 대표)가 연립 정권 후보로 호소카와를 밀어 비자민 정권을 만든 숨은 주역이었다.
최인한 기자 janus@hankyung.com
지난달 25일 내각을 발족한 후쿠다 야스오 총리(71)는 1976년 말부터 2년간 총리를 지낸 후쿠다 다케오의 장남이다.
일본 헌법에서 국가의 상징은 천황으로 명문화돼 있다.
그러나 천황은 '존재'하지만 '군림'하지 않는다.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고,국정을 총괄하는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는 '내각총리대신(총리)'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나선 일본은 1885년 내각책임제를 도입했다.
지난 122년 동안 총리가 된 인물은 초대 이토 히로부미 부터 현 후쿠다 야스오까지 총 58명이다.
일본에서 총리가 되려면 우선 국회의원으로 선출돼야 한다.
국회는 양원제로 중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이 있으나 중의원 우선 원칙에 따라 총리는 중의원에서 뽑는다.
지난달 25일 치러진 국회의 총리 지명 선거에서도 야당이 다수당인 참의원에선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 대표를 총리후보로 지명됐으나,결국 중의원에서 지명된 후쿠다 자민당 총리가 총리 자리에 올랐다.
총리의 급료는 월 220만엔(약1800만원) 정도.연간 600만엔정도의 보너스가 있고,통근 수당 등을 받는다.
총리의 면면을 살펴보면 일본 근현대사를 한눈에 읽을 수 있다.
군국주의 체제를 만들어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주변국을 침략,어두운 역사를 남겼는가 하면 패망한 일본을 다시 일으켜 세워 경제대국으로 부활시킨 지도자들도 있다.
1대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비롯,일본총리들은 한국과도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이토 총리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따라 한국의 초대 통감을 맡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식민통치의 원흉'으로 각인돼 있다.
그는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서구 열강과 러시아 등에 맞서 일본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강국으로 가는 초석을 다진 '현대화'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다.
50년이 넘는 자민당의 장기 집권을 가져온 인물로는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가 꼽힌다.
1954년 민주당을 결성,12월에 총리가 된 하토야마는 이듬해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자유민주당(자민당)이 탄생하자 총리직을 맡았다.
그는 국민적 지지를 배경으로 국내에선 보수당의 합당을 이끌어 내 정치적 안정을 달성했고,대외적으로 소련과의 국교 회복과 유엔 가입 등 굵직한 외교 현안을 해결했다.
자민당의 황금기를 열었던 인물은 7년8월간 전후 최장수 내각을 이끌었던 사토 에이사쿠 총리다.
그는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재임하면서 정치 안정과 함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오키나와 반환 협정을 성사시켰으며,'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과 핵확산 금지 조약에 조인한 성과를 인정받아 197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1965년 한국과 국교 정상화 조약도 체결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전후 정치를 총결산한 '대통령급' 총리로 평가받고 있다.
5년간 총리를 지낸 그는 1987년 퇴임한 후에도 정계의 '대부'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나카소네는 미국 위상이 약해진 반면 경제 전성기를 맞은 일본의 지위를 십분 활용해 미·일 동맹을 강화시켰고,국내에선 행정·재정 개혁을 추진해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일본 현대 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다.
2001년 4월부터 2006년 9월까지 재임했던 고이즈미 총리는 정가에서 '變人(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50여년간 파벌 정치가 지배해온 자민당에서 비주류로 변방을 떠돌던 그는 '파벌정치 해체''자민당 개혁'을 내걸어 일반 당원과 여론의 지지로 총리에 올랐다.
10년간 계속돼던 장기 불황과 자민당의 구태 정치에 염증을 느낀 민심의 흐름을 읽은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취임 후 당내 계파 안배 대신 총리 주도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해 규제 완화 등 구조개혁 정책을 밀어부쳐 일본경제가 장기불황에서 벗어나 세계경제의 리더로 다시 나설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93년 8월부터 약 8개월간 정권을 잡은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신당 당수는 의원수 35명의 군소정당(당시 자민당 223석) 출신으로 첫 총리직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을 만든 오자와 이치로(현 민주당 대표)가 연립 정권 후보로 호소카와를 밀어 비자민 정권을 만든 숨은 주역이었다.
최인한 기자 jan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