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기축 통화 美 달러

달러화가 위기를 맞고 있다. 가치가 급락하면서 위상도 보잘것없이 떨어졌다.

1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 3분기 유로화 엔화 등 6개 주요국 통화에 대한 달러화의 상대적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화지수는 77.66을 기록했다.

1973년 이 지수가 공식 집계되기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여파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하한 후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추가 인하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퍼지면서 달러 가치는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달러 약세가 추세로 자리잡으면서 달러 페그제(자국 통화 가치를 달러에 고정하는 제도) 포기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산유국들도 석유 수출대금 결제통화를 달러 대신 유로화로 바꾸려는 '탈(脫) 달러' 움직임이 확산되는 모습이다.

지난 30여년간 기축통화로서 요지부동의 면모를 과시하면서 자리잡은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달러가 주도하는 세계경제질서)'이라는 경제체제도 기로에 섰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팍스 달러리움의 역사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던 영국의 위상에 힘입어 파운드화가 세계 공식 화폐로 통용됐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 및 금융의 헤게모니를 쥐기 시작한 미국이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를 통해 파운드화를 밀어내고 달러화를 세계의 공용통화로 만들었다.

기축통화로서 달러는 1960년대 베트남전에 따른 미국 국가채무 급증으로 위기를 맞는다.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미국 경제는 파산 상태로 치닫고 달러를 떠받치던 금 보유액은 고갈됐다.


급기야 1973년 리처드 닉슨 당시 미 대통령은 금 태환 정지를 선언했다.

달러화의 지위가 통째로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뒤이은 오일쇼크가 달러를 기사회생시켰다.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산유국들이 급등하는 원유를 달러로만 수출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미 캘리포니아 뉴컬리지의 리처드 하인버그 교수는 "금으로 보증되던 달러가 사실상 석유로 보증돼 세계적으로 엄청난 달러화 수요를 유발했다"고 지적했다. 달러는 그때부터 '확고부동한 기축통화'의 지위를 다지면서 팍스 달러리움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美 약달러 용인은 통화시스템의 비극"

미국은 강한 달러를 통해 무역수지 적자 등 내부의 고질적 문제들을 감내할 수 있었다.

무역수지 부문에서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미국이 천문학적 규모의 장기 국채를 발행하면 각국 중앙은행들이 경쟁적으로 소화해줬다. 각국 중앙은행은 강한 달러와 미국의 신용도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기에 국채를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그것은 역으로 미국의 소비 붐을 만들었다. 빚으로 창출한 소비였다. 그 힘은 거대 경제가 3% 이상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전 세계 경제도 미국의 구매력 덕택에 순풍에 돛을 단 듯 성장세를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인 무역수지와 재정수지 적자 등 '쌍둥이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팍스 달러리움'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2001년 취임한 후 '강한 달러' 정책을 표방했다. 하지만 무역적자가 2006년 기준 7635억8800만달러로 2002년 이래 5년 연속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더 이상 강한 달러를 고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달러화는 다른 주요 6개국 통화(가중평균)에 비해 30% 가까이 떨어졌다.

특히 최근 낙폭이 컸다.

달러 가치 하락은 다른 나라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 수출 기업들은 자국 통화 강세에 부담을 갖고 있고,원유 거래를 달러 기준으로 해왔던 중동 국가들도 실질적인 수입금액 감소에 시달리고 있다.

가치의 안정성이 보장되는 않는 통화(달러)로는 거래할 수 없다는 불만이 세계 금융시장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미국 이코노미스트인 주디 쉘톤은 "부시 행정부가 겉으로는 '강한 달러'를 외치면서 실제론 아킬레스건인 무역적자를 줄이려고 '약한 달러'를 용인하고 있다"며 "이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세계 통화시스템에 비극"이라고 지적했다.

◆달러페그 포기 확산ㆍ원유시장 위상 흔들

달러 약세 추세가 고착화되면서 탈(脫) 달러 움직임이 가속화되는 추세다.

자기 나라 돈 가치를 달러화와 연동시킨 달러 페그제 국가들 사이에 페그제 폐지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 5월과 6월 쿠웨이트와 시리아가 달러 페그를 폐지한 데 이어 사우디아라비아마저 조만간 폐지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원유시장에서도 달러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달러 가치 하락으로 산유국들은 앉아서 손해를 봄에 따라 석유 수출대금을 유로화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확산되는 양상이다.

세계 4위 산유국인 이란은 최근 원유 결제통화에서 달러화를 뺐고 아랍에미리트는 외환보유액 중 유로화 비중을 5%에서 10%로 높이겠다고 밝혔다.

각국 외환보유액의 투자 다변화도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를 흔드는 요인이다.

1조4000억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을 쌓아놓고 있는 중국이 투자자산을 달러 외에 유로 등으로 다변화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다른 아시아 중앙은행들과 오일 머니의 원천지인 중동 국가들도 이에 동참할 태세다.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3월 말 현재 64.2%로 전 분기보다 0.4%포인트 하락했다.

반면 유로화 비중은 25.9%에서 26.1%로 높아졌다.

유럽중앙은행 자료에 따르면 유로화의 시중 유통량은 2002년 3320억유로에서 지난해 말 5780억유로로 급증했다.

FT는 작년 10월을 기준으로 이미 유로화 유통량이 달러화를 추월했다고 추산했다.

외형상으로는 기축통화의 자리가 이미 유로로 넘어간 셈이다.

◆추가급락 땐 글로벌경제 치명타

탈 달러 움직임이 확산돼 달러가 점진적인 하락이 아닌 급격한 추락을 겪을 경우 세계 경제에 치명타가 될 것으로 우려된다.

미국으로부터의 급격한 자본유출은 주가 폭락을 불러오고,자본유출을 막기 위한 금리인상은 주택경기 불황을 심화시키고 소비를 감소시켜 미국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겪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유럽연합(EU)은 아직 미국의 소비를 대체할 형편이 못 된다.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도 미국의 소비 부진을 충당하기엔 역부족이다.

때문에 달러 가치가 하락해 미국의 구매력이 감소한다면,전 세계적으로 동반 침체가 일어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달러 약세가 미국발 금융위기를 촉발하고 세계 경제에 큰 혼란을 초래한다는 시나리오다.

하지만 이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예고된 위기는 위기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달러 추락에 따른 '공멸의 두려움' 때문에 결국 선진국들이 협력해 달러 가치를 유지하게 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1973년 세계 경제는 고정환율제에 기초한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된 이후 플라자 합의(달러화 약세·엔화 강세 유도)로 대변되는 국가 간 합의를 통해 위기를 극복한 사례가 있다.

다만 대미 경제 의존도가 큰 한국으로선 최근의 달러 약세를 '경고음'으로 받아들여 장기적인 글로벌 신용경색 등 만일의 후폭풍에 대비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유병연/안재석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