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 해묵은 논란…정치권ㆍ시민단체 또 민감 반응

남북이 4일 `10.4선언'을 통해 남북관계를 통일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각기 법률적ㆍ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가기로 합의, 국가보안법 폐지 공방이 다시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남북이 상호 체제를 인정하면서 통일지향적으로 법제를 고치자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 남측의 국가보안법과 북측의 대남 적화통일을 목표로 한 노동당 규약.
국보법 개폐 논란은 국내에서 수십년간 지속돼 온 보혁(保革) 논쟁의 대표적인 화두로, 이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보수-진보세력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보다 존치와 폐지 자체를 놓고 목소리를 높였다.

`10.4선언'이 나오자마자 정치권 등은 벌써부터 이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 해묵은 국보법 개폐 논란 = 1948년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남북 분단과 대치라는 특수 상황에서 체제 수호를 위해 불가피한 법"이라는 반응과 "정권 안위를 위해 표현의 자유 등 각종 인권을 억압하는 악법"이란 평가를 동시에 받으며 개폐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남북 유엔 동시 가입, 1차 남북 정상회담, 6.15 남북 공동선언 등이 잇따르면서 폐지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2004년 8월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보법 폐지를 정부에 권고하기도 했다.

반면 인권위 권고 이틀 뒤 헌법재판소가 국보법 제7조 찬양ㆍ고무죄 및 이적표현물 소지죄 조항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려 국보법 유지 또는 개정론에 힘을 보태줬다.

현재 국회에는 여야가 각각 제출한 폐지안과 개정안이 계류돼 있다.

열린우리당이 제출한 국보법 폐지안과 형법 개정안은 국보법을 폐지하되 안보 공백이 우려되는 부분은 형법의 내란죄를 강화하자는 내용이고, 한나라당의 국보법 개정안은 국보법의 독소조항들을 개선하되 틀 자체는 유지하자는 것이다.

◇ 벌써 뜨거워지는 국보법 논쟁 = `10.4선언'이 발표되자 마자 정치권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낮은 단계 연방제 등 국민적 공감대 없는 6.15 공동선언을 고수하며 국가보안법 폐지 등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법률 정비 등의 합의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라고 강조했다.

안상수 원내대표도 "통일지향적 발전을 위해 법률적ㆍ제도적 장치를 정비한다고 했는데 결국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다'는 약속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했다.

비좌파대연합은 이날 서울 광화문 미국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유민주주의 헌법질서를 위태롭게 할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 종전 선언, 연방제 개헌, NLL 양보, 경제공동체 등에 대해 합의한다면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범여권 대선 후보들은 일제히 `준비된 평화 대통령'이라고 주장했고, 특히 이해찬 후보는 국보법 폐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국회 기자회견에서 "남북이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평화체제로 간다고 돼 있는데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두고 갈 수는 없다"며 "평화체제로 가기 위해 법률ㆍ제도적인 개선을 해나가기로 합의했고, 법적 제도적 부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국가보안법"이라고 말했다.

◇ 국보법 위반자 급감 = 법무부 통계 등에 따르면 입건자는 한총련 사태 등으로 `공안정국'이 조성된 문민정부 때 급증해 1997년 919명에 달했으나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1998년 829명, 1999년 730명으로 줄다 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000년 391명으로 급감했다.

이후 2001년 301명, 2002년 301명,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 210명, 2004년 164명, 2005년 107명, 2006년 62명으로 지속적인 감소세를 보였다.

구속자도 1997년 573명에서 1998년 397명, 1999년 273명, 2000년 118명 등으로 해마다 100명 이상씩 줄어든 뒤 2001년 112명, 2002년 109명, 2003년 77명, 2004년 32명, 2005년 12명으로 감소하다가 지난해 `일심회' 사건 등으로 22명으로 10년 만에 조금 늘었다.

검찰 관계자는 "1993년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돼 국보법 위반자가 급증했지만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남북 화해 분위기가 지속되고 2003년 9월 `한총련 관용화 조치'가 내려져 한 때 700~800명에 달했던 한총련 관련 수배자가 지금은 10명 안팎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강의영 기자 keyke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