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 열렬하던 유행 대중가요에 대한 사랑이 30대에 접어들며 시들해지더니 차츰 새로 등장하는 가수의 이름을 모르게 되면서 무관심하게 됐다. 마찬가지로 스포츠에 대한 열광도 스타의 이름이 낯설어지면서 식어갔다.
그런데 첨단기술과 과학에 대한 동경은 패턴이 조금 다르다.
10대에 시계를 분해하고 라디오를 조립하면서 애정을 키우기 시작했고 20대에 컴포넌트 오디오를 연결해 소리가 났을 때의 기쁨은 그 뒤에 경험하게 되는 성취감의 바로미터가 됐다. 이사를 가면서 가전제품에 대한 이해도와 친밀감은 높아갔다. 첨단제품일수록 내부구조나 작동원리를 알아야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친하다는 건 곧 현대,문명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과 생존능력에 대한 확신으로 전환됐다.
그런데 이 또한 30대에 접어들며 시들해졌다.
그런데 그건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한 것,곧 남의 탓이 크다.
10여년 전 어느 해 텔레비전,아니 튜너 기능이 내장된 29인치 브라운관 모니터를 샀을 때 따라온 리모트컨트롤이 대표적인 예다.
거기엔 비디오플레이어를 비롯한 외부기기를 제어하는 스위치는 물론이고 취침예약이니 자막방송이니 하는 기능을 제공하는 단추가 달려 있었다.
문제는 그게 나 같은 사용자에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외부기기는 연결할 게 없었고 어렵사리 취침예약을 하느니 잠들기 전 검지손가락 끝에 힘을 주는 편이 훨씬 간편했다.
또한 다양한 기능을 갖춘 기기는 그만큼 값이 비싸게 돼 있는데 그건 내가 좋아서 선택한 게 아니었다.
전처럼 공중파방송만 보려고 단순한 기능의 TV를 찾으면 그건 구닥다리라고 했고 그걸 찾는 나 자신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돼 버렸다.
휴대전화에 이르러서는 진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게 됐다.
이미 리모트컨트롤에서 뜨거운 맛을 본 나 같은 소비자는 과학,기술과 문명이라는 거대한 상대에 대해 완전히 피동적인 자세가 되어 '그들'이 베푸는 대로,하라는 대로 따라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중가요나 스포츠는 없어도 그럭저럭 살 수 있지만 과학,기술과 문명을 포기하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소비자,현대인을 고도의 감성적 장치 - 광고와 캠페인으로 반감을 최소화하는 한편 적당히 요령을 가르쳐 주며 자신들의 영지 안에서 착하게 살아가게 하고 있다.
책은 우리의 일상에 없어선 안 되는 것이지만 책에 관한 책은 전문가를 위한 책이다.
책에 관한 책에 관한 책이라면 세상에는 필요할 수 있지만 일상에는 그리 소용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대체로 가지고 있는 지각능력을 넘어선,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기술과 기능이 과연 인간에게 필요할까.
기능을 위한 기능을 위한 기능,기술을 위한 기술을 위한 기술은 극소수의 전문가에게 돌리고 인간을 위한 기술은 인간에게 돌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근래 일상과 연관된 과학,기술,문명이 단순해지고 인간화돼 가는 징조가 보이는 것이 반갑다.
예를 들면 통화기능만 있는 휴대전화,워드프로세서와 인터넷 정도가 가능한 노트북이 있다.
고기능,고사양,복합 기능의 첨단제품이 아니라 기본에 충실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그래서 많은 사람이 쉽게 쓸 수 있는 제품이다.
또 길과 공원에서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걷기,뛰기,자전거 타기는 정해진 장소에서 고성능의 도구를 사용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가며 비용을 많이 치르면서 하는 레저 스포츠와 달리 인간 육체의 기본에 충실하고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하게 드는 스포츠다.
거대한 경주장을 구경하면서 대리만족을 얻는 엘리트 스포츠가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땀으로 직접 만족감과 보람을 얻어낸다.
어떤 사업이든 결국 '인간을 위한,인간에 의한,인간의 사업'으로 귀결된다.
인기있는 제품을 만들려고 하거나 인기 직업에 종사하려면 먼저 인간을 생각지 않으면 안된다. 불필요한 기능,사전처럼 두꺼운 매뉴얼 북을 가진 '첨단?복합?다기능?고성능'제품처럼 인간을 소외시키고 이해시키지 못하면서 성공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이제 자전거를 타러 나갈 시간이 됐다. 투르 드 프랑스가 전혀 부럽지 않은 투르 드 한강의 자전거 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