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금융감독위원회 16차 정례회의. 미래에셋생명은 전날부터 마음을 졸였다. 회사의 신탁업 진출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회의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금감위는 이날 회의에서 미래에셋생명의 신탁업 영위 및 겸영 업무를 인가했다. 준비에 나선 지 1년 만에 이뤄낸 결과였다.

미래에셋생명이 마침내 보험업계 처음으로 신탁업에 진출할 수 있게 됐지만 그 과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미래에셋이 금융당국에 신탁업 진출의사를 타진한 것은 작년 10월. 그 때부터 서류를 들고 금감위와 금감원에 드나들기를 수십차례. 까다로운 사전 정지작업을 편 뒤인 올 1월24일에서야 예비 인가를 신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려움은 그 때부터였다. 금융당국은 두 차례에 걸쳐 서류보완을 요구했다. 경영진이 노조에 고발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심사를 유예하기도 했다.

예비인가를 받은 것은 지난 7월20일. 신청 6개월 만이었다. 정부의 민원사무처리 기준이 정한 심사기간인 60일을 훌쩍 넘긴 뒤였다. 금감원은 "공휴일과 서류보완,관계기관 조회 등에 필요한 기간을 제외하면 기한 내에 처리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심사기간 중에 주무부서인 은행감독국의 담당 팀장이 3차례,국장이 2차례나 교체된 것도 당연히 사무처리에 영향을 미쳤다.



미래에셋생명은 신탁업 진출을 위해 2개의 인가를 동시에 받아야 했다. 은행감독국에서 '신탁업 영위' 인가를,보험감독국에서 '신탁업 겸영'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은행감독국에선 사업 자체를 허가해 주고,보험감독국에서는 보험업과 신탁업을 엄격히 구분해 사업을 할 수 있는지를 따져본다는 게 금융당국의 설명이다. 하지만 금융당국 내에서도 이 같은 인.허가 절차에 대해 "누가봐도 중복규제이며 비용만 늘어날 뿐"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금융감독당국의 '늑장 인.허가 행정'이 금융시장의 발전을 더디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 비등하다. 금융시장 환경은 시간을 다투며 급변하고 있지만 금융감독의 행정 시스템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금융회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계 최대 화두는 신성장동력 발굴이다. 신규 사업에 진출하려면 금융당국의 인.허가가 필수적이지만 감독당국은 금융회사가 새로운 일을 하려면 색안경부터 끼고 본다. 여전히 공급자 중심의 규제에 젖어있는 셈이다.

중장기적으로 금융지주회사를 계획하고 있는 대한생명 역시 과잉규제에 발목 잡혀 있는 케이스다. 대한생명은 올 3월 감독당국의 승인을 조건으로 한화증권으로부터 한화투신운용 지분 100%를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아직 예비인가 서류도 접수시키지 못했다. 신청서를 제출하려고 할 때마다 '변수'가 생겼고 금융당국은 예외없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지난 4월 말 그룹에 불미스런 사건이 불거지자 감독당국은 "타이밍이 좋지 않다"며 승인신청 접수를 보류했다. 9월 초에는 공정위의 생보사 담합 조사가 빌미가 됐다. 감독규정상 공정위 국세청 검찰청 금감원 등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그 조사 및 소송 내용이 승인심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인정되면 심사를 유예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금융계 관계자들은 "오너의 소송 사건이 자산운용회사 인수 승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현대해상의 자산운용업 진출도 감독당국의 '보신 행정'으로 허송세월한 사례. 현대해상이 자회사인 현대해상투자자문의 자산운용사 전환을 감독당국에 타진한 것은 2005년 말. 당시 금융당국은 "자산운용회사 40여개가 난립한 상황"이라며 인가신청서를 받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여 뒤인 올 3월30일 예비인가를 신청했지만,4개월이 지난 7월 초에야 인가를 획득했다.

인가가 예상보다 2개월 늦어진 이유는 현대해상이 공정위로부터 담합조사를 받고 있었다는 점. 공정거래법상 벌금 이상의 형사 처벌을 받으면 자회사의 설립 등에 관한 승인을 받을 수 없다는 규정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현대해상은 과징금 처분을 받는 데 그쳤다. 결국 금감위는 확정되지 않는 사안을 예단해 승인절차를 유예시켰고 현대해상의 신사업 진출은 그만큼 늦어진 셈이다.

금융감독당국은 인.허가 심사시 자격요건을 엄격히 따져야 한다. 능력이 부족한 금융기관이 무리하게 사업에 뛰어들어 부실화될 경우 소비자 피해와 금융시장의 불안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당국이 그동안 보여준 인.허가 행정은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 많고 심사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게 금융계의 중론이다.

금융당국도 이를 부인하진 않는다. 한 관계자는 "감독당국의 속성상 기본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며 인.허가 문제와 관련해서는 조금이라도 꼬투리를 잡힐 일은 하지 않는 게 원칙처럼 돼 있다"고 전했다.

금융계에서는 "신규 업무 인가를 받는 일은 제조업체가 공장을 짓는 일보다 어렵다"는 불만이 터져나온다. 한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는 "국민소득 3만달러를 달성하려면 금융업을 키워야 한다는 데 모두가 공감하고 있지만 금융산업의 인프라인 금융감독기구의 시스템은 수요자 중심의 행정과 여전히 거리가 멀다"고 꼬집었다.

김용덕 금감위원장은 지난 8월 취임 일성으로 '금융감독 선진화를 통한 금융강국 건설'이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이의 실현을 위한 첫째 과제로 금융감독 시스템의 혁신을 꼽았다. 공염불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게 금융시장의 한결같은 주문이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