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송(唐宋)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문장가로 분류되는 소동파(1036~1101)는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 한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았으면…"하는 소원을 남겼다고 전해온다.
당송은 신라 고려와 무난한 외교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국경선을 통과하는 장애보다도 지리적 거리가 적지 않게 멀었다는 것이 더 큰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이 발원이 이루어졌다면 '전적벽부(前赤壁賦)'같은 명문장과 더불어 '금강산부(金剛山賦)'를 중국과 조선 선비들은 함께 읊조렸을지도 모르겠다.
남북의 지리적 거리는 가까웠다.
아니 같이 맞붙어 있기 때문에 사실 거리라고 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심리적 거리는 그렇지 않았다.
차라리 배나 비행기를 타고 바다나 대륙을 건너는 것이 훨씬 더 쉽고 가깝다고 느낄 정도였다.
지척의 금강산이 '올라갈 때는 남남이지만 내려올 때는 친구가 됩니다'라는 국내 유수 항공사의 광고카피로도 유명한 중국 황산보다도 더 멀었다.
절집에서도 해방 전 남북을 오가며 참선수행했던 성철·효봉스님 등 노장님들이 하나둘 열반에 들면서 그 유명했던 금강산 마하연선원까지도 수행도량 나열명부에서 사라졌고 또 차츰차츰 기억 속에서도 잊혀져 갔다.
그렇게 금강산은 승속(僧俗)으로부터 멀어져만 갔다.
더욱이 전후(戰後) 세대에게는 아득한 전설 혹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理想鄕)으로 바뀌어 갔다.
그런 금강산이 어느날 우리 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입구 신계사 터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이 남북을 이어주는 비보(裨補) 역할을 말없이 담당하고 있었다.
산에는 사람 냄새가 아슬아슬하리만치 실낱처럼 남아 있었다.
빈터 밖에 없지만 환영(幻影)처럼 요사채 자리에는 가마솥에서 밥할 때 나던 솔가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른 새벽 우물에서 길어 와,문필봉을 향해 아들의 과거시험 합격을 비는 정화수(井華水)처럼 맑은 어머니들의 간절한 정성이 신기루처럼 그대로 서려 있었다.
그래서 산은 산 그대로도 좋지만 인간과 함께 잘 어우러질 때 더욱 아름답다고 느끼게 된다.
신계사 터는 남북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도 여유가 있을 만큼 넓은 자리였다.
설사 동굴속의 천년어둠이라고 할지라도 등불 한 줄기에 그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마련이다.
60년 침묵의 공간이었지만 한 순간의 인기척에 그 사람 자리는 깨어나기 시작했다.
나무를 깎으면서 솔 향기가 났고 진흙 이기는 질척거리는 소리가 그치는가 싶더니 이내 기와 올리는 일꾼들의 땀냄새가 가득했다.
인민복 사이로 승복 차림도 보였고 남북의 사투리도 함께 어우러졌다.
기와집이 한 채 한 채 늘어날 때마다 함께 일한 이들의 마음은 더욱 가까워졌고 차츰차츰 동일한 소통구조가 만들어져 갔다.
'우리는 하나'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구체적 공동체로 나타난 것이었다.
드디어 금강산 신계사가 낙성되어 남북불이(南北不二)의 또다른 상징코드로 자리매김되었다.
하지만 건물의 완성은 형식의 완성일 뿐이다.
그 형식에 남북의 사람들이 함께 훈기를 채워넣지 않으면 그건 또다시 무정물(無情物)로 떨어짐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유정처(有情處)로 지속되기 위해선 또 다른 시작이 필요한 것이다.
완성은 끝이 아니라 또다른 출발이기 때문이다.
이제 위아래가 이 자리에서 자주자주 모여 항상 야단법석을 떨어야 할 것이다.
오늘 신계사 준공식날 아침 모두에게 또 다른 숙제가 주어졌다.
당나라 때 조주(778~897) 선사가 내린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그렇다면 그 하나는 다시 어디로 갈 것인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가 새롭게 던져졌다.
만고(萬苦) 끝에 도량은 만들었는데 이제 어떤 방향으로 꾸려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