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시절 규제의 양(量)을 반으로 줄였지만 국민들의 '체감 규제'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규제의 총량보다는 기술과 시장 발전에 맞춰 규제의 질(質)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경제계 시각에서 정부의 규제를 샅샅이 파헤친 '규제 적부심사' 결과가 발표됐다.지난 5월 한덕수 국무총리의 요청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한국경제연구원이 4개월에 걸쳐 실시한 규제 전수조사가 마무리된 것.

재계는 이번 조사에서 5000여건의 전체 규제 중 1664건의 규제를 폐지(516건)하거나 개선(1148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조석래 전경련 회장과 김종석 한경연 원장은 17일 한 총리를 방문해 이런 내용을 담은 '규제개혁 종합연구' 보고서를 전달했다.

◆규제가 글로벌 경쟁력 저하시켜

경제계는 이번 연구에서 △시장경제 원리 △기업환경 개선 △국가경쟁력 강화 △국민편익 증진 등 4가지 기준을 규제 평가의 잣대로 사용했다.경제계는 이 같은 기준으로 볼 때 규제개혁의 체감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정책적 규제'와 여러 부처가 관여하는 '덩어리 규제'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도권 규제,경제력 집중억제 규제,부동산 규제,노동 규제,교육 규제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 규제로 꼽혔으며,이런 규제들이 세계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기업과 국가경쟁력을 저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수도권 규제의 경우 최근 들어 국가 간 경쟁은 권역 간 경쟁 또는 도시 간 경쟁 양상을 띠고 있는데,우리나라 경제의 '허브'인 수도권을 묶어놓고 국내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따라서 수도권정비계획법,공장총량제 등의 수도권 규제를 과감히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또 잘하는 기업에 사실상의 불이익을 주는 출자총액제한 등의 경제력 집중억제 규제도 제거돼야 한다고 경제계는 강조했다.

모의조사 결과 이 같은 건의가 받아들여지면 세계은행에서 발표하는 국가 경쟁력 지수가 현재 30위에서 15위로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규제개선은 양보다 질이 중요

김종석 원장은 "이번 조사에서는 규제의 양보다 질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규제가 늘어나는 것 자체보다 규제가 사회 발전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라는 판단에서다.그는 특히 "정부는 여전히 규제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며 "지시,통제,적발을 중심으로 하는 규제 마인드가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경제계는 △효과에 비해 비용이 막대한 규제 △특정 집단에 특혜를 제공하거나 국민의 경제적 자유와 기회를 제한하는 규제 △규제집행자에게 과다한 재량권을 부여,비리의 소지를 일으키는 규제 △규제 집행이 사실상 불가능하거나 집행을 외면해 준수율이 매우 낮은 규제 등을 불량규제의 4대 유형으로 지적하고 폐지나 개선을 건의했다.

예를 들어 주택 분양가 공개는 득보다 실이 많은 규제로 지적됐고,방송광고 시장에서 한국방송광고공사의 독점 보장은 특정 집단에 특혜를 줘 국민의 자유와 기회를 박탁하는 대표적인 규제로 꼽혔다.

◆규제개혁 시스템도 개선해야

경제계는 현행 규제개혁 추진 체계도 개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규제개혁위원회의 위상 강화를 위해 독자적 정부조직으로 격상시키고 △최근 신설 규제의 절반 정도를 만들어내는 의원입법도 심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국회 규제개혁위원회)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또 규제 일몰제를 강화하고 모든 등록규제에 대한 타당성과 효과를 측정하는 등 규제관리 시스템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주선 한경연 박사는 "규제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보니 맹인은 하얀색 지팡이만 사용해야 한다거나 근로자 기숙사 침실 크기를 제한하는 등의 우스꽝스러운 규제도 많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