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하늘에 울려퍼진 음악은 매혹적이고 춤은 역동적이고 연기는 리얼했다.

공길과 장생의 이중창('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거')은 숨을 멈추게 하고 임금 연산의 탄식은 슬펐다.

경희궁 숭정전 앞뜰에서 펼쳐진 '공길전'(서울예술단)은 '미녀와 야수''시카고'같은 서양 뮤지컬에서 얻지 못한 감동을 맛보게 했다.

'공길전'은 영화 '왕의 남자' 원작인 연극 '이'(김태웅)를 뮤지컬화한 작품.여장광대 공길과 자유로운 영혼의 광대 장생,그리고 연산군의 사랑과 아픔을 마당극 형식에 담았다.

비속어 투성이에 상투적인 대사가 다소 거슬리고.주제로 내세운 사랑이 어설픈 사회개혁론에 가려진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결코 뻔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근래 국내의 문화예술시장,특히 뮤지컬시장을 보면 국력 신장이 실감난다.

1980년대엔 아무리 유명한 작품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주말 3회 공연을 넘기기 어려웠다.

지금은 브로드웨이 흥행작 등의 타이틀만 붙으면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곳곳에서 한 달 이상 장기 공연된다.

그러나 서양뮤지컬의 경우 세계적인 히트작이라도 우리 현실과는 차이가 있고 번역 탓이겠지만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식으로 가사와 음(音)이 제대로 맞지 않는 일도 잦다.

'공길전'의 배경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고 주제가는 들으면서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쉽다.

'절절한 사랑'이란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만큼 세계 무대에 진출할 가능성도 충분해 보인다.

문제는 관객의 성원이다.

장기공연 레퍼터리로 자리잡으면 상소리 위주의 억지 우스갯소리 같은 부분은 저절로 걸러지고 다듬어질 것이다.

커진 시장을 외국작품에 내주고 있는 건 뮤지컬에 그치지 않는다.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에 한류 바람이 불면서 문화예술이야말로 21세기 국가경쟁력이자 성장동력이라는 구호는 여전하지만 현장을 보면 과연 그런지 의문이다.

지방마다 웅장하게 지어놓은 문화회관은 행사장에 그치고,연극가엔 셰익스피어 등 외국작가 작품 투성이다.

미술시장은 사상 유례 없는 호황이라는데도 유명백화점 벽엔 국내작가 작품 대신 이른바 '신정아 연서(가짜라는)'에 언급된 오스트리아 화가 클림트의 '키스'가 걸렸다.

소설시장엔 요시모토 바나나,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본작가에 이어 바진,모옌,위화,쑤퉁 등 중국작가까지 세력을 넓히고 출판시장 판도를 좌우하는 것도 온통 번역물이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신데렐라 드라마 복제에 매달리는 동안 미드(미국드라마)와 일드(일본 드라마) 마니아는 늘어나고,'미녀는 괴로워''하얀 거탑''아이 엠 샘'등 영화와 드라마 히트작은 일본 만화 내지 소설 각색품이다.

창작극은 불륜과 출생의 비밀로 도배질한 짝퉁 드라마와 사극이 거의 전부다.

이러고도 문화 강국,한류 세계화를 꿈꾼다.

문화예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문화콘텐츠를 실어나를 정보통신망이 세계 최강이면 무엇하랴.이대로 가다간 늘어난 시장 덕에 오히려 문화식민지가 될지도 모를 판이다.

문화예술의 진정한 힘은 창작품에 있고 창작은 창작자에 대한 정당한 대우,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비롯된다.

뮤지컬 '공길전'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