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황금사리병 1430년만에 '햇볕'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1430년 전인 577년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터의 목탑이 있던 자리에서 황금사리병을 포함한 금ㆍ은ㆍ동 사리기(舍利器)가 발굴됐다.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장엄구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특히 청동으로 만든 원통형 함에는 조성 시기와 이유를 담은 명문(銘文)이 있어 백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터 발굴 현장에서 황금사리병 등 출토유물 일체를 공개했다.
발굴 당시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외병에 봉안됐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원통형 청동사리함에 담긴 채 출토됐다.
높이 10.3㎝의 청동 사리함 몸체에서는 '丁酉年二月(정유년이월)/十五日百濟(십오일백제)/王昌爲亡王(왕창위망왕)/子立刹本舍(자립찰본사)/利二枚葬時(리이매장시)/神化爲三(신화위삼)'이라는 5자6행의 29자 명문이 확인됐다.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뜻.그러나 실제 사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명문 기록에 따라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의해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 35년)에 낙성된 것으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조성 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태자 외에 또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가 567년에 조성된 능산리 사찰보다 10년 늦게 조성됐음이 밝혀짐에 따라 6세기 중반 백제 사찰의 조성 양식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아울러 지진 등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묻은 진단구(眞壇具)에서 목걸이와 팔찌,비녀,금귀고리 등 장신구와 금ㆍ은ㆍ옥ㆍ금동제품,관모장식과 운모로 만든 연꽃,중국 남북조시대 북제(550~577년) 연간에 사용한 상평오수전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터의 중심축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로 추정되는 시설도 확인됐다.
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금ㆍ은ㆍ동 사리기 발굴로 왕흥사 창건 연대가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백제 사리기의 봉안 방법과 목탑 심초부 조성 기법 등이 확인됐다"며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발견 이래 백제 지역 최대의 발굴 성과"라고 평가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장엄구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특히 청동으로 만든 원통형 함에는 조성 시기와 이유를 담은 명문(銘文)이 있어 백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터 발굴 현장에서 황금사리병 등 출토유물 일체를 공개했다.
발굴 당시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외병에 봉안됐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원통형 청동사리함에 담긴 채 출토됐다.
높이 10.3㎝의 청동 사리함 몸체에서는 '丁酉年二月(정유년이월)/十五日百濟(십오일백제)/王昌爲亡王(왕창위망왕)/子立刹本舍(자립찰본사)/利二枚葬時(리이매장시)/神化爲三(신화위삼)'이라는 5자6행의 29자 명문이 확인됐다.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뜻.그러나 실제 사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명문 기록에 따라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의해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 35년)에 낙성된 것으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조성 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태자 외에 또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가 567년에 조성된 능산리 사찰보다 10년 늦게 조성됐음이 밝혀짐에 따라 6세기 중반 백제 사찰의 조성 양식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아울러 지진 등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묻은 진단구(眞壇具)에서 목걸이와 팔찌,비녀,금귀고리 등 장신구와 금ㆍ은ㆍ옥ㆍ금동제품,관모장식과 운모로 만든 연꽃,중국 남북조시대 북제(550~577년) 연간에 사용한 상평오수전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터의 중심축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로 추정되는 시설도 확인됐다.
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금ㆍ은ㆍ동 사리기 발굴로 왕흥사 창건 연대가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백제 사리기의 봉안 방법과 목탑 심초부 조성 기법 등이 확인됐다"며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발견 이래 백제 지역 최대의 발굴 성과"라고 평가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