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으로 수백명씩 차세대 리더 양성

사토 포드재팬 고문 CEO특강 '기업승계전략 '

1998년 미국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는 일본 도요타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

기존의 종신고용체제를 유지하는 한 도요타의 미래는 어둡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대해 오쿠다 히로시 당시 도요타 회장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I don't think so)"고 잘라 말했다.

현재 세계 경제계에서 차지하는 도요타의 위상으로 볼 때 오쿠다 회장과 무디스의 대결에서 승자는 오쿠다 회장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본 기업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사토 카쓰히코 전 포드재팬 회장(현 포드재팬 및 플레시먼힐러드 재팬 고문)은 '종신고용(lifetime employment)'을 발전시킨 '안정고용(stable employment)'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사토 고문은 24일 '기업 승계 전략'이라는 주제로 최고경영자(CEO) 조찬 특별 강연에 서 "성공한 일본 기업들은 최소한의 글로벌 스탠더드(글로벌 미니멈)를 받아들이되,일본 기업 고유의 가치를 유지한 회사들"이라고 강조했다.

그 결과물인 안정고용 체제 내에서 중장기적인 안목으로 인재를 발굴,육성하는 게 최근 일본 기업들의 기업 승계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사토 고문에 따르면 일본 기업들은 1990년대 초반 일본 경제의 거품 붕괴,급속한 세계화,엔화 강세,인구 고령화 등의 환경 변화에 따라 인사 정책을 바꿔야 했다.

연공서열과 종신고용으로 대표되던 일본 기업 특유의 인사 시스템을 버리고 개인 성과에 따른 보상,비용 절감을 위한 인력 감축 등의 미국식 인사 시스템을 받아들여야 했다.

사토 고문은 "이 같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그대로 받아들인 기업들은 모두 결과가 좋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국식 단기 업적주의가 CEO들의 장기적인 안목을 흐려놓은 탓이다.

하지만 도요타,캐논,닛산과 같은 성공적인 기업들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어디까지 받아들이고,일본 고유의 가치는 어느 수준까지 유지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이 과정에서 종신고용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사토 고문은 "원래 종신고용은 일본 기업 전문가인 제임스 아베글렌이 말한 '평생 헌신(Lifetime Commitment)'이라는 개념이 잘못 해석된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종신고용의 폐쇄적이고 획일화된 시스템은 수정하되,종업원들의 평생 헌신을 이끌어낼 수 있는 문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게 성공한 일본 기업들의 믿음이었다.

이는 고용을 유지하면서도 공정한 경쟁과 혁신을 독려하는 '안정고용'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브라질 출신의 CEO 카를로스 곤이 이끄는 닛산이 대표적인 사례다.

곤 사장은 취임 후 경영위기에 처한 회사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체 직원의 14%에 해당하는 2만1000여명의 인원을 감축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의 평생고용제도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이런 소망은 미래에 닛산을 이끌 차세대 리더를 육성하는 제도를 구축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곤 사장은 취임 직후인 1999년 임명자문위원회(Nomination Advisory Council)라는 조직을 신설했다.

CEO 자신과 최고운영책임자(COO),4명의 전무급 임원,5명의 HR 임원,5명의 커리어 코치 등 12명으로 구성된 이 조직은 한 달에 한 번씩 회의를 열어 차기 경영자 후보를 발탁하고 육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닛산은 임원급에서 200명,그리고 잠재력이 뛰어난 젊은 인력 중 200명을 선정해 경영자 수업을 시키고 있다.

수시로 토론회를 개최하고 최고경영진이 직접 강연을 하기도 한다.

5명의 풀타임 커리어 코치는 차기 경영자 후보 400명의 경력을 관리해주고,교육 프로그램을 짜주며,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CEO에게 보고한다.

사토 고문은 "닛산이 차세대 리더를 선정할 때에는 개인 성과뿐 아니라 리더십 역량이 중요한 잣대가 된다"고 말했다.

과거 근속연수에 따라 승진을 하던 종신고용제도의 허점을 보완하되,팀워크를 중시하는 일본 기업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그는 "이 같은 기업 승계 시스템은 단순히 차기 경영자가 누구인지를 찾아내는 것에서 벗어나 조직원들을 움직이고,기업 전체를 운영하는 하나의 경영 전략으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생활용품업체인 가오도 닛산과 비슷한 기업 승계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가오도 다른 일본 기업들과 같이 10여년 전 글로벌화라는 큰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P&G 등 다국적 기업들과 정면승부를 벌여야 했고,엔ㆍ달러 환율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해외로 진출해야 했다.

또 경쟁력을 잃은 전자사업을 구조조정해야 했다.

하지만 가오는 "글로벌 기업으로 살아남으려면 가오만의 가치,즉 '가오웨이'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가오는 이를 위해 300여명의 후보군을 차세대 리더로 육성하면서 가오웨이를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일본 제조업 특유의 장인정신인 '모노츠쿠리',현장중심 경영철학인 '겐바이즘',서로에 대한 존경과 팀워크 등이 가오가 강조하는 가치다.

차세대 리더들은 가오웨이를 이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춰야 한다.

결국 닛산,가오 같은 일본의 우량 기업들은 이 같은 경영 승계 프로그램을 안정고용이라는 시스템에 접목시킴으로써 △장기적인 안목 △조직에 대한 헌신 △팀워크 중심 문화 등 일본 기업 고유의 장점과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 △혁신에 대한 의지 등 서구 기업의 경쟁력을 모두 갖추게 됐다.

사토 고문은 "안정고용이 종신고용과 다른 점은 종신고용 체제 아래서는 차세대 리더가 특별한 프로그램 없이 자연스럽게 정해지지만,안정고용 체제에서는 전략적이고 의도적으로 육성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를 위해서는 CEO가 CHO,즉 최고인재담당자가 되어 경영 승계 과정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



Tips 모노츠쿠리와 겐바이즘

'모노츠쿠리(物作り)'는 물건을 만든다는 뜻으로 일본은 '제조(製造)'보다는 모노츠쿠리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일본 특유의 섬세함과 장인정신이 포함된 의미로 일본의 경쟁력은 손끝에서 나온다는 '손끝 경쟁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고급 제품의 대명사였던 소니 샤프 파나소닉 등 '모노츠쿠리'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제 공산품은 1960년대 이후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거품 붕괴에 따른 10년간의 장기 불황을 딛고 최근 일본이 다시 살아난 것도 이 같은 일본 기업의 기술력이 뒷받침된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겐바이즘은 일본어 '겐바(現場)'와 영어의 추상명사형 어미인 '이즘(ism)'의 합성어로 현장을 중시하자는 '현장주의'를 의미한다.

대표적 기업인 도요타는 '생산현장'에 한정하지 않고 모든 부서에 '현장'을 완벽하게 구현해 항상 문제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게 하고 원인을 밝혀 개선토록 했다.

현장경영을 위해 간부들은 세 번에 한 번꼴로 현장을 둘러보고 문제의 원인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