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인도에서 배운 '느림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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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림 시인 >
작년부터 내겐 계속 외국 갈 기회가 생겼다.
카자흐스탄,중국,캄보디아,터키….최근엔 책 출간 때문에 인도의 위대한 시인 카비르를 취재하기 위해 인도에 다녀왔다.
유달리 인도는 가장 힘들면서도 깨달음이 많았던 곳이다.
특히 인도 성지인 바라나시에서 받은 문화적인 충격은 컸다.
갠지스 강가 주변은 경악할 정도로 지저분했고,그 더러움에 개의치 않는 인도인들이 몹시 경이로웠다.
내 마음은 경악에서 경이감으로 저울추처럼 이동했다.
길마다 널려 있는 배설물,여기저기서 울리는 시끄러운 차 경적음 소리와 더러운 악취에 비위 약하고 깔끔 떠는 성격의 나는 몸서리를 쳤다.
바라나시는 신의 은총을 받고 싶거나 죽음을 맞이할 때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찾을 만큼 성스런 곳이라는데,나는 견딜 수 없는 악취를 먼저 맡게 되었다.
그들은 똥물까지 흘러든 강물을 성수(聖水)라 하여 물병에 담고 기도를 올리고 목욕과 수영을 했다.
하물며 이를 닦고 낡은 호텔의 침대보를 빨고 있었다.
부활을 위한 정화로서 시신을 태우고 재를 뿌린다는 갠지스강.온갖 세균과 유해물질로 가득하다는 이 강이 힌두교도들에게 만큼은 내세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죄를 씻고,병을 고칠 수 있는 곳이었다.
현실의 시간이 순탄하게 흘러가도,나의 내면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막상 배를 타보니 경이로운 광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행해지는 의식이 조화롭고 장엄하기까지 했다.
갠지스강 주변 마을 더러운 골목을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내가 아는 더럽고 깨끗함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도인들은 너무나 열심히 씻고 닦고 잘 사는데,왜 나는 이곳에서 몸서리를 칠까.
괴로웠다.
1차적인 감각의 고통에 시달리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 속에서 나만이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 배설물이나 악취 등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원시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인도의 애잔한 풍광은 뒷전으로 미뤄놓고 있었다.
그제서야 인도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매일 '푸자 아르티'라는 제사의식에서 인도인들이 기원을 담아 신성한 갠지스강에 띄우던 꽃불이었다.
가슴을 아련하게 흔드는 꽃불과 향 내음 앞에 숙연했다.
여행 마지막날에 묵었던 요가의 본고장 리쉬케쉬나 시골의 갠지스강도 더없이 아름답고 그리운 풍경이었다.
경이로운 타지마할,'숨은 마을'을 뜻하는 오르차의 신비로운 성,카주라호에서 본 생동감 넘치고 아름다운 카마수트라의 조각상들에선 얼마나 예술적 생명력을 위대하게 느꼈던가.
인도에서 무엇보다 내가 매혹된 것은 인도 여성의 90%가 입는다는 전통의복 싸리와 펀잡이었다.
하늘하늘하고 화려한 여인들의 옷자락이 아스름한 연기처럼 흐르지 않았다면 그토록 인도가 흥미롭진 않았을 것이다.
낡고 불편하면 새것으로 갈아버리는 첨단의 시대 속에서 전통과 원시의 풍경이 지켜지는 인도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내내 생각했다.
인도인들은 기차역마다 버려진 쓰레기와 자주 눈에 띄는 커다란 쥐와 벌레들도 하나의 우주순환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돌고 도는 게 인생이며,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믿는다.
우주와 운명에 순응하겠다는 것이 인도의 철학이다.
현대인들에게 그립고 중요한 화두(話頭)이기도 한 '느림의 철학'과도 통한다.
1600명의 신이 있다는 인도에서 10억이 넘는 인구를 서로 조화롭게 하나로 묵는 힘은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 마음을 두고 살아서란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행복지수는 선진국들보다 높은 것이다.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문화를 이끌고 지구를 굴려가고 있다.
인도뿐 아니라 그 어떤 먼 나라도 세계화의 흐름속에서 비켜설 수 없다.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잘 알고 존중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인으로서의 삶이 참 중요하다.
고된 여행길에서 얻은 깨달음은 갠지스강 위로 날던 매처럼 꿈꾸는 하늘을 크게 펼쳐가고 있었다.
작년부터 내겐 계속 외국 갈 기회가 생겼다.
카자흐스탄,중국,캄보디아,터키….최근엔 책 출간 때문에 인도의 위대한 시인 카비르를 취재하기 위해 인도에 다녀왔다.
유달리 인도는 가장 힘들면서도 깨달음이 많았던 곳이다.
특히 인도 성지인 바라나시에서 받은 문화적인 충격은 컸다.
갠지스 강가 주변은 경악할 정도로 지저분했고,그 더러움에 개의치 않는 인도인들이 몹시 경이로웠다.
내 마음은 경악에서 경이감으로 저울추처럼 이동했다.
길마다 널려 있는 배설물,여기저기서 울리는 시끄러운 차 경적음 소리와 더러운 악취에 비위 약하고 깔끔 떠는 성격의 나는 몸서리를 쳤다.
바라나시는 신의 은총을 받고 싶거나 죽음을 맞이할 때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찾을 만큼 성스런 곳이라는데,나는 견딜 수 없는 악취를 먼저 맡게 되었다.
그들은 똥물까지 흘러든 강물을 성수(聖水)라 하여 물병에 담고 기도를 올리고 목욕과 수영을 했다.
하물며 이를 닦고 낡은 호텔의 침대보를 빨고 있었다.
부활을 위한 정화로서 시신을 태우고 재를 뿌린다는 갠지스강.온갖 세균과 유해물질로 가득하다는 이 강이 힌두교도들에게 만큼은 내세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죄를 씻고,병을 고칠 수 있는 곳이었다.
현실의 시간이 순탄하게 흘러가도,나의 내면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막상 배를 타보니 경이로운 광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행해지는 의식이 조화롭고 장엄하기까지 했다.
갠지스강 주변 마을 더러운 골목을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내가 아는 더럽고 깨끗함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도인들은 너무나 열심히 씻고 닦고 잘 사는데,왜 나는 이곳에서 몸서리를 칠까.
괴로웠다.
1차적인 감각의 고통에 시달리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 속에서 나만이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 배설물이나 악취 등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원시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인도의 애잔한 풍광은 뒷전으로 미뤄놓고 있었다.
그제서야 인도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매일 '푸자 아르티'라는 제사의식에서 인도인들이 기원을 담아 신성한 갠지스강에 띄우던 꽃불이었다.
가슴을 아련하게 흔드는 꽃불과 향 내음 앞에 숙연했다.
여행 마지막날에 묵었던 요가의 본고장 리쉬케쉬나 시골의 갠지스강도 더없이 아름답고 그리운 풍경이었다.
경이로운 타지마할,'숨은 마을'을 뜻하는 오르차의 신비로운 성,카주라호에서 본 생동감 넘치고 아름다운 카마수트라의 조각상들에선 얼마나 예술적 생명력을 위대하게 느꼈던가.
인도에서 무엇보다 내가 매혹된 것은 인도 여성의 90%가 입는다는 전통의복 싸리와 펀잡이었다.
하늘하늘하고 화려한 여인들의 옷자락이 아스름한 연기처럼 흐르지 않았다면 그토록 인도가 흥미롭진 않았을 것이다.
낡고 불편하면 새것으로 갈아버리는 첨단의 시대 속에서 전통과 원시의 풍경이 지켜지는 인도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내내 생각했다.
인도인들은 기차역마다 버려진 쓰레기와 자주 눈에 띄는 커다란 쥐와 벌레들도 하나의 우주순환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돌고 도는 게 인생이며,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고 믿는다.
우주와 운명에 순응하겠다는 것이 인도의 철학이다.
현대인들에게 그립고 중요한 화두(話頭)이기도 한 '느림의 철학'과도 통한다.
1600명의 신이 있다는 인도에서 10억이 넘는 인구를 서로 조화롭게 하나로 묵는 힘은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 마음을 두고 살아서란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행복지수는 선진국들보다 높은 것이다.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문화를 이끌고 지구를 굴려가고 있다.
인도뿐 아니라 그 어떤 먼 나라도 세계화의 흐름속에서 비켜설 수 없다.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잘 알고 존중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인으로서의 삶이 참 중요하다.
고된 여행길에서 얻은 깨달음은 갠지스강 위로 날던 매처럼 꿈꾸는 하늘을 크게 펼쳐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