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濟民 < 연세대 교수·경제학 >

얼마 전 경상북도 성주에 사는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성주 사람들은 앞으로 경부운하만 되면 성주도 항구도시가 돼 땅값이 수십 배 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몇 달 전 이야기이니 이미 성주 땅값이 많이 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명박 후보의 경부운하 공약이 단순히 경제정책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부운하가 지나가는 낙동강과 한강 유역의 주민 수백만명이 비슷한 기대를 하고 있을 테니 그것이 다 '표' 아닌가.

당선 후 사정을 보아가면서 하겠다지만 과연 그렇게 될지 의문이다.

공약은 해 놓았는데 선거는 해마다 있으니 안 하기가 쉽겠는가.

결국 경부운하는 경제 논리보다 정치 논리에 따라 시행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대선 후보의 정책에 정치 논리가 끼어들 가능성은 이명박 후보의 경우만이 아니다.

정동영 후보의 '정글 자본주의'론(論)은 어떤가.

지금 조금이라도 국제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 같은 나라가 세계화라는 '정글 자본주의' 논리를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세계적 여건이 그런데 국내에선들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게 되는 것을 어떻게 막겠는가.

"정글 자본주의는 안 된다"는 것은 무지(無知)의 소산이 아니라면 국민을 20 대 80 식으로 갈라 선거에 이용하자는 정치 논리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이명박 후보에게 경부운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정동영 후보에게 '20 대 80 사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 두 후보도 결국 역대 대선 후보들처럼 나름대로 좋은 것은 다 망라한 공약을 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 중에서 어떤 것이 시행되는가이다.

경험에 따르면 무엇보다 정치 논리가 실린 것이 시행될 가능성이 높다.

현 정부에서도 그랬다.

수많은 공약 중에서 수도 이전 공약이 먼저 시행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 이전이 충청도 표를 얻겠다는 정치 논리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던 것 아닌가.

경부운하나 '20 대 80 사회' 같은 구호가 대선 후보에게 매력적인 것은 표가 된다는 것 뿐 아니다.

당선 후에 시행하기도 쉽다.

일단 대통령이 되고 나면 토목공사나 단순한 재분배정책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국가 권력을 이용해서 재원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토목공사나 단순 재분배 정책 같은 것이 아니라 세계화라는 '정글자본주의'를 헤치고 새로운 성장과 일자리 창출 메커니즘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고부가가치 부문에서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는 것 외에 방법은 없다.

이런 작업은 민간 주도로 이뤄져야겠지만,정부가 해야 할 일도 많다.

규제 개혁,맞춤형 인력 공급,중소기업을 위한 금융 인프라 정비,노사관계 안정,경영 투명성 확보,적절한 사회안전망 마련,그리고 사회적 신뢰와 합의의 바탕이 되는 공정한 분배상태 달성 등 모두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일은 토목공사나 단순 재분배 정책보다 훨씬 어렵다.

그런 일만 하겠다고 공약했다 하더라도 집권하고 나면 토목공사나 단순 재분배 정책을 시행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터인데,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밀하게 따져보면 두 후보가 경부운하나 '20 대 80 사회' 같은 것을 내세우는 것이 과연 선거에 도움이 될지 의심스럽다.

운하가 지나가는 주변 지역 주민은 생각이 다르겠지만,국민 대다수는 이미 경부운하가 이명박 후보의 최대 약점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정동영 후보의 '20 대 80 사회'의 경우는 더 분명해 보인다.

"자기들이 실정(失政)을 해서 양극화를 만들어 놓고는 선거에 이용해 먹는다"는 인식이 작년에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완패한 한 이유가 아니었던가.

어쨌든 한국의 유권자는 세계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고 정치에 대한 관심도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