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무협소설 대가 진융 "북한 군인들도 내 소설 팬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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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단의 '대협(大俠)'으로 불리는 중국 현대문학의 '살아있는 신화'.1972년 '녹정기'를 끝으로 절필한 지 3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루쉰과 함께 각종 설문조사에서 중국의 문화위상을 보여주는 최고의 인물로 꼽히는 작가.
중국에서 팔린 그의 작품만 1억부를 훨씬 넘고,그의 문학세계를 연구하는 '김학(金學)'까지 생겼다.
무협소설의 대가 진융(金庸.84)이다.
1986년대 중반 '영웅문'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그가 다시 뉴스 인물이 됐다.
무단 번역됐던 '영웅문'의 원작 '사조삼부곡'('사조영웅전''신조협려''의천도룡기') 한국어판이 김영사에 의해 최근 정식 번역 출간된 것이 계기다.
지난 1일 그의 작품만을 전문적으로 펴내는 홍콩의 밍허(明河)출판사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난 그는 '대협'이라는 경칭과 달리 아담한 체구에 온화한 미소를 띤 노신사였다.
"한국에서 비공식 출판된 나의 작품들이 최근 북한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편지를 북한의 군인 친구들로부터 받았어요.
한류가 아시아권에서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었듯이 내 소설도 앞으로 그러기를 바랍니다."
1955년부터 72년까지 그가 발표한 무협소설은 15편.1980년 중국에 처음 소개된 이후 성서보다 더 많이 읽혔다는 '모택동 어록'의 판매기록을 갈아치웠다.
국내에서도 밤을 지새우며 그의 작품을 탐독했던 팬들이 많았고,현재 대표적인 그의 소설 팬카페 회원수는 1만6000여명이나 된다.
하지만 요즘 그는 한류 팬이다.
한국 드라마 '대장금'을 열렬히 좋아하고 '친절한 금자씨''엽기적인 그녀' 등 한국영화도 즐겨본다.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건 무엇보다 예술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예술성 없이는 상업적인 성공도 거둘 수 없어요.
내 소설에도 예술성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봐요."
자신의 대중 무협소설을 문학 작품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논쟁에 대한 그의 견해다.
그는 "나의 문학관은 무협소설을 통해 인간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며 평화와 화합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평생 동안 정치평론과 무협소설을 함께 써온 그는 "정견은 3년 정도 지나면 바뀔 수 있지만 예술은 20~30년 후에도 남아야 한다"며 "작품 안에 정치적 견해를 되도록 넣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가로 칭송받는 것과 달리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중국 대륙의 저장(浙江)성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중일전쟁 와중에 어머니가 병사했고,아버지는 1951년 반동지주로 몰려 처형됐다.
1955년 일간지 '밍보(明報)'를 창간한 그는 "오른손으로 정치평론을 쓰고,왼손으로 소설을 썼다"고 했다.
1994년 언론계에서 완전 은퇴한 이후 그는 역사 연구에 몰입했다.
2년 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유학해 석사 학위를 받은 데 이어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홍콩=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중국에서 팔린 그의 작품만 1억부를 훨씬 넘고,그의 문학세계를 연구하는 '김학(金學)'까지 생겼다.
무협소설의 대가 진융(金庸.84)이다.
1986년대 중반 '영웅문'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그가 다시 뉴스 인물이 됐다.
무단 번역됐던 '영웅문'의 원작 '사조삼부곡'('사조영웅전''신조협려''의천도룡기') 한국어판이 김영사에 의해 최근 정식 번역 출간된 것이 계기다.
지난 1일 그의 작품만을 전문적으로 펴내는 홍콩의 밍허(明河)출판사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난 그는 '대협'이라는 경칭과 달리 아담한 체구에 온화한 미소를 띤 노신사였다.
"한국에서 비공식 출판된 나의 작품들이 최근 북한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편지를 북한의 군인 친구들로부터 받았어요.
한류가 아시아권에서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었듯이 내 소설도 앞으로 그러기를 바랍니다."
1955년부터 72년까지 그가 발표한 무협소설은 15편.1980년 중국에 처음 소개된 이후 성서보다 더 많이 읽혔다는 '모택동 어록'의 판매기록을 갈아치웠다.
국내에서도 밤을 지새우며 그의 작품을 탐독했던 팬들이 많았고,현재 대표적인 그의 소설 팬카페 회원수는 1만6000여명이나 된다.
하지만 요즘 그는 한류 팬이다.
한국 드라마 '대장금'을 열렬히 좋아하고 '친절한 금자씨''엽기적인 그녀' 등 한국영화도 즐겨본다.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건 무엇보다 예술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예술성 없이는 상업적인 성공도 거둘 수 없어요.
내 소설에도 예술성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봐요."
자신의 대중 무협소설을 문학 작품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논쟁에 대한 그의 견해다.
그는 "나의 문학관은 무협소설을 통해 인간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며 평화와 화합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평생 동안 정치평론과 무협소설을 함께 써온 그는 "정견은 3년 정도 지나면 바뀔 수 있지만 예술은 20~30년 후에도 남아야 한다"며 "작품 안에 정치적 견해를 되도록 넣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가로 칭송받는 것과 달리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중국 대륙의 저장(浙江)성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중일전쟁 와중에 어머니가 병사했고,아버지는 1951년 반동지주로 몰려 처형됐다.
1955년 일간지 '밍보(明報)'를 창간한 그는 "오른손으로 정치평론을 쓰고,왼손으로 소설을 썼다"고 했다.
1994년 언론계에서 완전 은퇴한 이후 그는 역사 연구에 몰입했다.
2년 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유학해 석사 학위를 받은 데 이어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홍콩=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