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천 < 문학평론가 · 경희대 겸임교수 >

온 세상이 가을로 가득하다.

이즈음 푸르렀던 자연생명들도 깊어가는 가을과 계절의 궁합을 맞추며 '울긋불긋'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울긋불긋이란 우리말 의태어가 이 때만큼 세상과 잘 어우러지는 적도 드물다.

단풍이 물든 동네 뒷산은 물론 자연예찬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울긋불긋,즉 사전풀이 그대로 '짙은 여러 가지 붉은 빛깔이 다른 빛깔들과 뒤섞여 야단스럽다'(우리말 큰사전).낙엽지는 계절의 낭만과 울긋불긋한 천연의 마음으로 충만한 계절이 바로 아름다운 한국의 가을인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가을은 아내의 잔소리가 집중되는 삭막한 계절이기도 하다.

1년 내내 잔소리를 듣지 않는 시절이 어디 있을까마는 특히 이맘 때쯤이면 집중 포화를 맞는다.

이 좋은 계절에 팔 할의 게으름과 일 할의 무기력, 또 나머지 일 할의 둔감증으로 무장하고 대학과 집 사이를 낡은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나의 행태에 대한 아내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딸아이의 친구 이름과 그들 부모의 가족적이고 다정다감한 품성에 대한 정보가 쏟아지는 것도 주로 이 시기다.

주말만이라도 아이와 가까운 산에 다녀오라는 아내의 요구에 나의 대답은 한결 같다.

아직 아이가 어려서 산행은 무리라는 것,하여 '바깥활동'보다는 실내에서의 놀이가 오히려 아이에게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그러나 이런 궤변이 이미 '싸움의 기술'을 터득한 '생활의 달인'인 아내에게 통할 리 만무하다.

결국 지난 주말 나는 습관처럼 아내와 이삼십분 간 실랑이를 벌이다 마침내 딸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아파트 현관을 나설 때만 해도 가까운 산이라도 찾아 모처럼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가을 산이,가을이 우리 부녀를 거부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투명했던 하늘이 금방 비라도 쏟을 기세였다.

할 수 없이 아이와 상의한 후 지하철을 타고 시내에 위치한 큰 서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서로 목적지는 같았지만 분명 목적은 달랐다.

지하철의 육중한 움직임을 여전히 겁내하는 딸아이가 선뜻 그곳에 가자고 한 이유는 단 한가지다.

형형색색의 초콜릿을 파는 상점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딸은 그 사실을 기억한 것이다.

물론 나는 아이에게 동화책이나 한 권 집어주고 그 동안에 신간 도서라도 살펴 볼 깜냥이었다.

비동일성의 동시성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사정이야 어찌됐건,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서점으로 향했다.

일요일,그것도 오전 시간이라서 그런지 지하철역을 나와 바라본 서울 시내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자주 다니던 익숙한 길이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라진 주말 아침의 도시는 낯설고 쓸쓸했다.

더욱이 꽤 비만해 보이는 비둘기들이 이 도시의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는 모습에서 애초에 가졌던 가을 정취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감마저도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가을 풍경과 이 계절의 그윽함은 다 어디로 갔을까.

스스로 생각해봐도 조금은 유치한 다소 과장된 감상에 젖은 채 서점에 들어섰다.

순간 나는 매우 놀랐다.

약간의 비약을 동원해서 말하자면 거기서 나는 가을을 만났다.

울긋불긋한 천연의 마음들과 마주쳤다.

도서 진열대의 좁은 통로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위인전이며 만화책을 읽고 있는 어린 학생들,시집코너 근처를 서성이며 열심히 시를 줍고 있는 문청들,언뜻 보기에도 동전 두 개 두께는 돼 보이는 돋보기안경을 치켜올려가며 독서에 열을 올리는 할아버지 등 내 마음 속 가을의 전형적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이 아침에 나는 계몽적 상상력과 연계해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우연히 목격한 도심 속의 불타는 가을 풍경을 여러 사람에게 약간은 들뜬 심정으로 전하고 싶을 뿐이다.

혹 가을과 대면할 기회를 놓쳐 버린 주말 아침 상황에 대한 나의 과잉보상 심리가 발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건조한 우리의 일상에서 모처럼 가을의 향기를 맡았다고,너무도 오랜만에 가을의 깊이를 느꼈다고 자꾸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