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석유 준메이저로 부상한 렙솔YPF가 스페인 경제의 도약을 이끌고 있다.

불과 7년 전 석유 준메이저로 올라선 렙솔YPF는 자국의 석유ㆍ가스 자주개발률(국내 총소비 물량 중 국내 자본으로 생산한 물량의 비중)을 단숨에 60%까지 끌어올리며 에너지 자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눈앞에 둔 초(超)고유가 시대를 맞아 렙솔YPF의 성공신화는 더욱 빛나고 있다.

렙솔YPF는 1990년대 후반까지 글로벌 석유시장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군소 업체였지만,정부 주도 하의 기업 인수·합병(M&A)과 외교 지원 등으로 순식간에 준메이저로 성장했다.

민(기업)ㆍ관(한국석유공사)이 '따로국밥식' 원유 탐사로 전력을 분산하고 있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렙솔YPF가 좋은 벤치마킹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100㎞쯤 떨어진 모스톨레스.스페인 석유기업 렙솔YPF의 연구ㆍ개발(R&D)센터인 '알폰소 테크놀로지'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마드리드 시내 카스티야에 있는 본사가 전 세계 글로벌 사업장을 관장하는 '몸통'이라면,이곳은 각 사업부문에 혈액(생존전략)을 공급하는 '심장'이다.

글로벌 에너지 환경이 급변하면서 알폰소 테크놀로지도 바빠지고 있다.

수요처가 필요로 하는 선제적 기술 개발로 경쟁사를 따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텃밭으로 여겨왔던 ABB(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지역에서 자원민족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데다 신흥 강호인 중국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칼로게로 밀리오레 알폰소 테크놀로지 수석팀장은 "에너지 메이저 간 경쟁은 석유가 매장된 땅을 차지하려는 '영토 전쟁'에서 '하이 테크놀로지' 경쟁으로 바뀌는 추세"라고 말했다.

지난해 300여명이 근무하는 이 R&D센터의 예산은 6800만달러.밀리오레 팀장은 "R&D센터의 올해 예산은 지난해보다 30% 정도 늘었다"며 "R&D센터가 렙솔의 글로벌 메이저 진입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알폰소 테크놀로지는 현재 렙솔의 자원개발 및 생산(E&P)사업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전 세계 지질학자,컴퓨터과학자,첨단 벤처기업들과 손잡고 이른바 '만화경(Kaleidoscope) 프로젝트'에 착수한 것.이 프로젝트는 심해유전 등 난(難)개발 지역을 원격 카메라로 촬영한 뒤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매장량과 탐사성공률을 예측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한마디로 지반을 뚫기 전에 유전 정보를 확인하겠다는 얘기다.

렙솔은 R&D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메이저의 꿈을 키우고 있다.

◆'빅딜'로 몸집 키우다

렙솔은 스페인 정부의 전방위 지원과 M&A라는 '터보엔진'을 장착하면서 메이저 진입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서유럽 변방의 중소 정유회사였던 렙솔은 1999년 아르헨티나 국영 석유기업인 YPF를 인수하면서 글로벌 에너지시장에서 '키플레이어'로 부상했다.

에너지독립의 바로미터인 스페인의 석유 및 천연가스 자주개발률은 2006년 말 현재 각각 43%와 122%에 달한다.

렙솔은 YPF를 인수하기 전에도 10개 기업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결혼정책'을 통해 가문을 키워온 것.1942년 설립한 엔카소(ENCASO)가 모체다.

윤활유 제조ㆍ판매회사로 출발한 엔카소는 사업 영역을 정유화학 분야로 확장했다.

이후 1987년 석유 탐사ㆍ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히스파놀,에니에파소,INH 등도 정부의 '프로젝트성 M&A'정책 덕에 렙솔 밑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공격적 M&A에도 불구하고 렙솔은 글로벌 메이저에 '맞짱'을 뜨기엔 몸집이 작았다.

도약의 계기를 만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였다.

1999년 아르헨티나가 국가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국영 석유기업 'YPF'의 주인을 찾아 나선 것.하지만 당시 YPF 인수는 쉽지 않았다.

전문가들이 YPF 인수는 렙솔은 물론 스페인의 '국운'을 거는 모험이라며 극렬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YPF의 매입가는 당시 렙솔 총자산의 두 배에 달하는 152억달러.실제로 YPF 인수 후 렙솔은 한동안 단기 부채비율 267%,장기 부채비율 538%의 부실덩어리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사 합병으로 파생된 시너지는 전문가들의 부정적 전망을 일거에 날려보낼 만큼 엄청났다.

렙솔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E&P 비중은 27%에서 39%까지 상승했고,보유 유전량만 10억배럴에서 450억배럴로 증가했다.

또 칠레 페루 브라질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의 YPF 자회사를 흡수,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정부가 중매자

렙솔이 조그만 윤활유회사로 출발해 에너지부문 세계 10위권의 준메이저로 도약한 과정에는 정부라는 지원군이 있었다.

스페인 정부는 에너지를 국가 주력 산업으로 분류하고 물심양면의 지원책을 펼쳤다.

출자 등을 통한 재정적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회사 간 '빅딜'도 정부가 진두지휘했다.

무엇보다 10개 석유화학 기업 간 수평적 M&A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다 보니 시간과 경제적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특히 유럽연합(EU) 가입을 앞둔 1987년에는 에너지 생산 및 정유ㆍ판매업체를 통폐합해 렙솔에 독점권을 주는 유럽 M&A 사상 전대미문의 특혜를 안기기도 했다.

렙솔은 1997년까지 순차적으로 정부 지분을 매각해 완전 민영화됐다.

하지만 YPF 인수 때 사실상 정부가 보증을 서는 등 보이지 않는 지원은 렙솔이 글로벌 준메이저로 우뚝설 때까지 계속됐다.

◆렙솔의 경영성과와 전략

렙솔의 사업영역은 E&P,정제,화학,가스 등 4개 부문으로 나뉜다.

지난해에는 4개 사업부문에서 총 794억6000만달러(약 72조140억여원)를 벌어들였다.

순이익은 82억7600만달러(약 7조5000억여원)에 달한다.

사업부문별로는 E&P가 렙솔의 '캐시카우'로 꼽힌다.

지난해 E&P부문 매출은 150억8200만달러로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9%.그러나 순이익 비중은 전체의 57%에 달하는 47억4000만달러에 달하고 있다.

렙솔은 현재 22개국에서 E&P사업을 진행 중이며,개발권을 취득한 석유매장량은 33억5200만배럴로 추정된다.

하루 평균 석유생산량은 114만6000배럴이다.

마드리드=손성태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