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기자 시절 일이다.

며칠 새 유명 호텔의 극장식당 쇼와 지난 8월 타계한 김천흥옹(翁)의 '춘앵무' 공연을 봤다.

수많은 출연자와 온갖 프로그램이 빠르게 돌아가는 식당쇼는 지루했던 반면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작은 돗자리 위에서 김옹 혼자 추는 춤은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 알았다.

크고 화려하다고 풍성한 게 아니라 때로는 비어있음에서 가득함이 전해진다는 사실을.165㎝가 될까말까 한 작은 체구의 김옹이 천천히 양팔을 쭉 뻗을 때 무대는 꽉 차고 가슴은 벅찼다.

일본의 한 미술관에서 한ㆍ중ㆍ일 도자기전을 관람하던 순간의 경험도 잊지 못한다.

모양과 무늬 모두 다채로운데다 커다란 중국 도자기는 놀랍고,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일본 도자기는 기막혔다.

그러나 빈틈없이 꽉찬 문양,울긋불긋하거나 짙은 색깔을 보는 눈은 어지럽고 마음은 심란했다.

그러나 소박하고 덤덤한,채워진 곳보다 빈 곳이 많은 한국 도자기에 눈길이 닿자 갑갑했던 마음은 단박에 편안하고 푸근해졌다.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미술-여백의 발견'전(展)에 주목하는 건 이런 까닭이다.

전시작은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아우르고,장르 또한 도자기 조각 그림 사진 설치까지 폭넓다.

형태는 다르지만 각기 여백에서 우러나는 그윽함과 여유,자유로움을 내뿜는 것들이다.

꼭 필요한 형상 외엔 몽땅 비워놓은 정선의 '단발령 망(望) 금강산'과 이인상의 '장백산도'가 그렇고,형체만으로 충분히 넉넉한 달항아리와 얼굴무늬 수막새가 그렇다.

장욱진의 '강변풍경'과 백남준의 'TV부처',서세옥 이종상의 그림,황인기의 '방(倣) 인왕제색도',배병우 등의 사진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갈 길을 찾기 힘든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이다.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고요하고 은근한 전시작들을 둘러보노라면 정신없이 사느라 까맣게 잊었거나 잃었던 꿈과 소신이 떠오를지 모른다.

이게 이렇다고 강요하지 않는,비어있는 곳들로 인해 무한한 상상력이 되살아날 수도 있고.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