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블라디미르 원장 "강제이주 설움 민요에 담아 한국魂(혼) 심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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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픈 인생에서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음악과 조국이었습니다."
연해주에서 옛 소련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강제 이주했던 한국인들의 산증인인 김 블라디미르 카자흐스탄 고려문화중앙회 원장(79)은 9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대교문화재단(이사장 강영중)의 '제16회 눈높이 교사상(해외부문)' 시상식에서 자신의 인생 역정을 이렇게 요약했다.
음악교사 출신인 그는 "일년내 농사지은 쌀 40㎏으로 중고 바이올린을 사서 음악을 공부한 것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확실히 남는 장사였다.
고국을 생각하며 도라지타령,새타령,밀양아리랑,농부가와 같은 한국 민요를 가르치다 보니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1937년 현재 카자흐스탄이 위치한 구소련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한 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목동,농부 등으로 일하다 늦게 음악을 공부했다.
교편을 잡은 것은 1955년부터.그 후 올해까지 50여년간 카자흐스탄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2~3세를 가르치고 있다.
그가 공을 들여 지도한 것은 자신의 전공인 음악과 한국어.특히 한국의 민요를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전수했다.
"교사가 된 이후 휴가는커녕 토요일 일요일 한번 제대로 못 쉬었습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불쑥 한국어,한국 노래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쉴 틈이 없었어요.
15년 전 아내와 사별한 이후 고려문화중앙회 사무실이 내 집이다 생각하고 늘 거기에 있습니다."
그가 지역사회에서 유명한 인물이 된 것은 수십 차례에 달하는 음악 대회 우승 경력 때문이다.
김 원장이 교사로 재직하던 깔뻬솝호스중학교 합창단은 지역대회뿐 아니라 1957년,1967년,1970년,1977년 공화국 대회에서도 우승한 바 있다.
카자흐스탄 지역에는 한국인을 포함,130여개의 민족이 뒤섞여 산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각종 대회들은 자연스럽게 민족 대항전의 성격을 갖는다.
김 원장이 한국인들을 주축으로 한 합창단을 조직해 잇달아 음악 대회를 휩쓸자 자연스럽게 현지인들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을 열기 전만 해도 소련 사람들 중 한국이란 나라가 있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합창단을 조직해 콘테스트에 나가는 것이 당시로선 조국을 홍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요.
음악 대회에 나가면 그 외에도 좋은 점이 많습니다.
'한국어를 배워 무엇하겠느냐'던 학생들이 콘테스트를 관람한 후 한국 말,한국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요."
김 원장은 70년 만에 어려운 기회를 잡아 한국을 찾은 만큼 남은 일정을 쪼개 한국의 민요들을 수집할 계획이다.
그는 "한국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고 카자흐스탄에 있는 한인들에게 생생한 조국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며 "어린 시절 말로만 들었던 남대문 동대문에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
연해주에서 옛 소련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강제 이주했던 한국인들의 산증인인 김 블라디미르 카자흐스탄 고려문화중앙회 원장(79)은 9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대교문화재단(이사장 강영중)의 '제16회 눈높이 교사상(해외부문)' 시상식에서 자신의 인생 역정을 이렇게 요약했다.
음악교사 출신인 그는 "일년내 농사지은 쌀 40㎏으로 중고 바이올린을 사서 음악을 공부한 것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확실히 남는 장사였다.
고국을 생각하며 도라지타령,새타령,밀양아리랑,농부가와 같은 한국 민요를 가르치다 보니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1937년 현재 카자흐스탄이 위치한 구소련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한 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목동,농부 등으로 일하다 늦게 음악을 공부했다.
교편을 잡은 것은 1955년부터.그 후 올해까지 50여년간 카자흐스탄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2~3세를 가르치고 있다.
그가 공을 들여 지도한 것은 자신의 전공인 음악과 한국어.특히 한국의 민요를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전수했다.
"교사가 된 이후 휴가는커녕 토요일 일요일 한번 제대로 못 쉬었습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불쑥 한국어,한국 노래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쉴 틈이 없었어요.
15년 전 아내와 사별한 이후 고려문화중앙회 사무실이 내 집이다 생각하고 늘 거기에 있습니다."
그가 지역사회에서 유명한 인물이 된 것은 수십 차례에 달하는 음악 대회 우승 경력 때문이다.
김 원장이 교사로 재직하던 깔뻬솝호스중학교 합창단은 지역대회뿐 아니라 1957년,1967년,1970년,1977년 공화국 대회에서도 우승한 바 있다.
카자흐스탄 지역에는 한국인을 포함,130여개의 민족이 뒤섞여 산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각종 대회들은 자연스럽게 민족 대항전의 성격을 갖는다.
김 원장이 한국인들을 주축으로 한 합창단을 조직해 잇달아 음악 대회를 휩쓸자 자연스럽게 현지인들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을 열기 전만 해도 소련 사람들 중 한국이란 나라가 있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합창단을 조직해 콘테스트에 나가는 것이 당시로선 조국을 홍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요.
음악 대회에 나가면 그 외에도 좋은 점이 많습니다.
'한국어를 배워 무엇하겠느냐'던 학생들이 콘테스트를 관람한 후 한국 말,한국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요."
김 원장은 70년 만에 어려운 기회를 잡아 한국을 찾은 만큼 남은 일정을 쪼개 한국의 민요들을 수집할 계획이다.
그는 "한국을 좀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고 카자흐스탄에 있는 한인들에게 생생한 조국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며 "어린 시절 말로만 들었던 남대문 동대문에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