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A임원은 올해 초 신수종 사업 아이템을 찾기 위해 국내 유명 대학과 국책연구소들을 샅샅이 훑고 다녔지만 결과는 허탕이었다.

정부 R&D 예산을 많이 가져다 쓰는 연구기관들이라 내심 기대를 많이 했는데 쓸 만한 아이디어를 얻지 못했다는 것.그는 "연구 성과가 좋다고 알려진 곳도 직접 가서 보면 기업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먼 주제에 매달려 있거나 심지어 기업들이 1~2년 전에 연구한 걸 붙들고 있는 곳도 있었다"고 말했다.

국가 R&D 투자 규모가 매년 급증하고 있지만 투자 성과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고 있다.

물론 특허출원 건수나 국제 학술지에 게재되는 논문 수는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경제적.산업적 영향력 측면에서 눈에 띄는 성과가 드물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R&D 투자 규모는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섰지만 투자 성과는 아직 개발도상국 티를 벗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 '돈 되는 연구 성과'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국책연구소와 대학 등 290개 공공연구기관의 지난해 기술 이전율은 21.4%로 미국(35.9%)이나 유럽(46.8%)보다 훨씬 낮았다.

기술 이전율은 개발된 기술이 얼마나 기업 등 외부로 이전됐는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비율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활용도가 떨어져 '잠자는 기술'이 많다는 의미다.

R&D 투자 대비 기술료 수입의 비중도 1.5%에 그쳤다.

미국의 3분의 1,유럽의 2분의 1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다.

이렇다보니 특허유지비가 기술수입료보다 훨씬 많은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과학기술부가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과기부 산하 26개 연구소가 2000년부터 올 8월까지 해외 특허등록과 유지에 쓴 돈은 321억원으로 해외에 기술이전을 한 대가로 받은 수입(16억원)의 20배에 달했다.

이처럼 투자 성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

상품성을 따지지 않고 '특허를 위한 특허'를 내는 경우가 많은 게 주된 이유다.

특허청 관계자는 "미국 과학자들은 수익창출과 기술보호를 위해 특허를 내지만 한국 과학자들은 (연구 결과에 대한) 성과 평가 때문에 특허를 내는 일이 많다"며 "그 결과 실제 사업화되지 않는 특허가 남발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KAIST의 한 교수는 "바이오나 나노가 뜬다고 하면 너도나도 이 분야 연구로 예산을 타쓰려하고, 정부는 이를 제대로 거르지 못하고 지원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이런 식으로는 CDMA나 와이브로와 같은 기업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신기술,그리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기술을 만들어 내기 어렵다"고 잘라말했다.

R&D 과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최종 상품화를 담당하게 될 기업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분위기도 한 원인으로 꼽힌다.

모 대기업 관계자는 "국가 R&D 과제를 선정할 때 기업들이 목소리를 내면 '국가 사업에 특정 기업의 이익을 반영하려 한다'며 못마땅해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이에 반해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의 국책 연구소들은 연구과제를 정할 때부터 기업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연료전지 전문업체인 퓨얼셀파워의 신미남 사장은 "대학과 국책 연구소의 주고객은 결국 연구 결과를 사업화해야 하는 기업"이라며 "연구과제 선정부터 평가까지 고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제대로 된 투자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들이 장기적 비전보다는 시류에 편승해 '임기 중에 한 건 올리겠다'는 관료적 사고를 버리지 못한 것도 문제다.

모 국립대 교수는 "최근 정부 고위 관료를 만났는데 북한과 함께 해볼만한 연구가 없는지 묻더라"며 "양극화 해소를 위해 지방이라고 가점주고,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고 북한 관련 연구개발을 한다는 식의 발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히 참여정부들어 지역균형발전을 이룬다는 명분 아래 R&D 예산의 지방 배정을 급격히 늘리고 있는 데에 대한 비판이 높다.

R&D 주체들 간 역할 분담이 적절히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관순 한미약품연구센터 소장은 "기업의 R&D 수준이 과거와 달리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환경에서 정부나 국책연구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래 유망사업에 대한 원천기술 개발쪽으로 집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부나 국책연구소가 당장 눈앞의 성과에 급급해 남들이 하는 과제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이윤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기업을 이기기 어렵고 중복투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

이언오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1990년대 초까지는 정부 주도로 R&D를 진행하는 한국적 모델이 효율성을 가졌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며 "민간 자율을 확대하고 R&D 현장 리더를 발굴하는 동시에 리더 간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획취재부=김수언/주용석 기자 indepth@hankyung.com